역대 길었던 장마
김창영
어떤 화가들은 대상을 그리지만 또 어떤 화가들은 분위기(ambiance)를 그린다. 각각의 화가들에게는 고유한 분위기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양식(style)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후자에 속하는 작가에게 있어 이러한 스타일은 양식인 동시에 그의 주제가 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아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와 같은 작가들에게 있어 이러한 양식과 주제의 일치(coincidence)는 회화를 단적으로 추상적이고 미니멀한 방향으로 지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회화가 그것의 분위기로 환원되는 것이다.
김창영은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고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사건과 모순, 고통과 부조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살아온 시기는 한국 사회가 전쟁과 빈곤, 독재와 폭력,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생겨난 수많은 비극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시기는 예술에 있어서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혼돈과 아노미를 강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흔과 트라우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회화는 어찌 보면 그러한 생각과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역대 길었던 장마>는 은유적인 동시에 집단적 경험에 대한 공감각적 전달을 위해서 고안된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동명의 작품은 푸른 강물 흐름 위로 살짝 중첩된 면을 지닌 핑크색 노을을 연상시킨다. 중첩된 면의 보랏빛은 모호한 지대(zone)을 만들고 있으며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것의 움직임을 따라가게 된다.
김창영은 매우 고운 레이어의 페인팅을 겹겹이 쌓아올려 화면을 지배하는 얼룩을 그린다. 이 얼룩으로 이루어진 색면은 대체로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제 혹은 독립적인 대상이 되는데, 때로는 동물이나 괴물, 거대한 산봉우리, 바다 위에 떠있는 섬 같은 모습들을 연상시킨다. 이 대상들은 톤의 대비가 크지 않은 다른 색면들과 아슬아슬하게 접해 있거나 혹은 그것들의 그림자와 겹쳐지기도 한다. 작가는 마치 안개 속에서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은 이 형태들을 ‘일루젼’, 즉 환영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들은 두려움이나 희망이 다가오는 것처럼, 혹은 먼 곳에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날씨를 호출하거나 (<구름 낀 맑음> 연작), 아예 <비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들은 부르거나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
김창영의 작업들이 자주 커다란 사이즈의 화폭에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몰입감 때문이다. 게다가 가까이에 다가서서 보았을 때의 완벽함을 위해 작품의 표면은 매우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붓질로 처리되어 있다. 반투명의 핑크색, 혹은 청회색 레이어들은 거의 텅 비어있다고 느껴질 만큼 흐릿하게 느껴져서, 뒤로 몇 걸음을 물러 나와서야 비로소 화면의 회화적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관객들이 응시하는 것은 캔버스이거나, 흐릿한 대기의 흐름이거나, 혹은 그저 몰입할 수 있는 텅 빈 화면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관객을 침잠과 낮은 호흡으로 이끄는 회화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다.
김창영 작가가 만드는 이미지는 부드럽게 채색된 모노크롬 연작이다. 작가는 처음 떠올린 단순하며 명징한 최초의 이미지를 수 회 반복되는 붓질을 통해 모호하지만 거대한 색면으로 표현한다. 구체적인 일상의 현실과 사건, 분명한 주제 모두를 색채의 안개 속에 용해시키는 모노크롬을 통해 작가는 역설적으로 현실과 만난다. 작업은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모노크롬의 채색으로 은유하면서 평화와 전쟁, 갈등과 화해, 폭력과 대화가 혼재하는 세계와 일상을 견디는 과정이다. 작가의 명료하고 평평한 칼라는 수많은 실재의 역사와 현실과 상상과 관념이 혼융된 독특한 균형의 순간을 은유한다.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