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선

건져올려진 이들의 초상

박광선

박광선은 오랫동안 낡은 합판 위에 유화로 인물화를 그려왔다. 공사판이나 길거리의 ‘버려진 합판’을 주워와 유화의 바닥재로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스스로의 작업을 어떻게 정치(定置)시키는지 밝히고 있다. 잘 준비된 캔버스 대신 사용된 버려진 합판은 그 자체로 배제되고 용도 폐기된, 극단적으로 소외된 대상을 떠올린다. 유화의 바닥재로서는 부적절한, 제소(gesso)조차 발려있지 않은 표면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수행적 제스처이다. 이러한 과정은 통상적 회화에 대한 저항이자 회화를 관념적 조건들로부터 탈각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한다. 박광선의 그림은 이러한 회화적 제스처의 증거물이자, 작가의 선택으로부터 비롯된 파생물인 것이다.

버려진 화판의 전유로 인해 화가와 그림의 관계는 통상적인 작품의 제작이나 생산을 넘어서는 대상과의 ‘조우’ 나아가 ‘연(緣)’으로 이어진 관계를 떠올린다. 무엇보다도 이 나무판들은 모두 어떤 인물들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 인물들은 단순히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일종의 토템처럼 입체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합판 위에 인물을 그리고는 그려진 인물 주위를 말끔한 윤곽 대신 펜치 등을 이용해 자르고 뜯어냄으로써 벽면으로부터 튀어나온 부조로 탈바꿈시켰다. 이 인물들은 회화적 배경을 지니는 대신 실제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즉 평면과 입체 사이의 불특정한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2012년 작 <Thill>은 합판의 얇은 레이어 위에 옅게 유화로 인물을 그린 뒤 다시 흰색 판넬에 붙인 작업이다. 이 작품만 해도 아직 합판의 레이어가 독립적인 위치에 놓이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2016년의 <Broken The Faith>에서는 이미 쇼올을 쓴 채 촛불을 든 여성의 것처럼 보이는 그림자와 그 앞에 좀 더 작고 어둡게 그려진 남성의 모습은 마치 서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하나의 나무판 위에 그려져 있으며, 독립적으로 절취된 윤곽을 지니고 있다.

박광선이 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옅은 물감을 있는 그대로의 합판 표면에 발라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바닥작업이 안된 나무가 물감을 흡수하면서 특히 얼굴의 톤이 다소 어두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발려진 물감을 긁어내거나 문지르는 경우도 있는데, 2018년 작 <세 자매>는 기본채색을 한 뒤 다시 물감을 수직으로 문질러서 지우는 방식으로 그렸다. 가운데 신부복을 입은 여성의 머리장식의 흰 물감은 마치 실패한 그림에서처럼 인물의 얼굴을 가로질러 흘러내리고 있으며, 다른 여성들의 얼굴표정은 거의 다 지워진 상태이다. 박광선의 작품을 특징 짓는 ‘최소한’은 단순히 표현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회화의 ‘경제적’ 영역을 가로지른다. 그의 회화가 ‘가난’하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재료의 차원이 아니라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2020년 작 <슬픈 늑대>는 <Thill>에서처럼 바탕의 캔버스에 인물이 그려진 합판 레이어를 붙이는 방식으로 그려졌는데, 바닥의 캔버스 천은 의도적으로 오랫동안 밟고 다닌 바닥깔개처럼 물감과 먼지들로 더럽혀져 있다.

2019년에서 최근까지 그린 작품들에서 박광선은 종종 캔버스를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빠르고 간결한 그림의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회화적 레이어를 파괴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바탕 칠 위에 작은 마스킹 테이프 조각들을 붙이고 인물을 그린 뒤 나중에 떼어내는 방식으로 그린 그림들에서 나타난다. 2020년 작 <내가 생각한 만큼 나를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을 그린 것으로, 빠르고 거칠게 그려진 인물의 얼굴은 그의 시선 만큼이나 흐릿하게 뭉개져 있다. 심지어 얼굴의 일부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조각들로 인해 떨어져 나가고 있어서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인다. 이는 2021년작 <Too Chairs>나 <램지어가 우물에 독을 탔다>에서도 엿보이는데, 이 작품들에서 구멍난 레이어는 단지 인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화면에 그려진 공간 전체에 적용되고 있다. 부정적 기억이나 감정을 암시하는 이러한 표현은 박광선의 회화가 단순한 재현이 아님을 떠올리게 한다. 안토닌 아르토의 ‘부적 드로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들은 실제 삶의 관계 혹은 경험 속에서 도출된 매개적 존재들처럼 보인다.

작가 노트

공간은 시간을 돌아서 성립되고 진행된다. 1980년대까지 성행했던 탄광 산업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쇠퇴해갔다. 석탄 생산량 축소로 정선, 태백, 삼척 등 탄광 지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폐허화 되어갔다. 그 속에서 삶의 터를 잡고 살아 가는 사람들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갈 길을 잃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막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제각각 사연이 있고 삶의 희망을 갖고 모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장소와 시간을 돌아서 이 현대적인 거대 도시에서 숨쉬며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 근대 산업화의 핵심을 이루던 노동집약적 산업들은 점차 사양화되었다. 인구 감소와 산업합리화는 수급구조의 불균형에 대한 조정이다. 역사적 시간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서 우리는 잠시 머물러 시간을 소비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전 세대 보다 주체적 사고가 좀 더 용이해졌다. 어찌보면 갱도에서 목숨걸고 채굴해야만 했던 시간을 지나 원석을 다듦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작업을 통해 우리의 기억속에 그리고 문화속에 지속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런 지속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개체에 집중하며 사회 주변을 기웃거린다.

박광선 
b.1972
개인전
2021 <색을 지우다>, 더숲 갤러리, 서울
2020 <응시: 다시, 또 벗어나는>, 아트노이드178, 서울
2018 <수집과 변형>, 아터테인, 서울
2004 <벽계수>, Art&I, 서울
2003 <기웃거리기>, 대안공간 풀, 서울
2인전
2020 <COL+-> 박광선&수레아, 갤러리 인,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어떤 사람>, 아트스페이스 휴, 파주
2020 <불편한 손>, 스튜디오126, 제주
<PAJU Act.2>, Artists’ studios&Art spaces in PAJU Book City, 파주
2019 <베일 듯한 베일>, 아트노이드178, 서울
<세상의 모든 드로잉>, 아터테인, 서울
2013 <게릴라전>, 갤러리 곽, 양평
2004 <나>,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갤러리, 서울
<Use your illusion>, 마로니에 미술관 소갤러리, 서울
2003 <uncanny-어떤낯섦>, 갤러리 라메르, 서울
레지던시
2019 휴+네트워크 창작 스튜디오, 파주

시간의 얼룩
황석권 《월간미술》 편집장

오랜 기억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곱씹어 보면 망각의 목적을 일깨우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그 이외의 기억은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 기억이란 대상과의 관계에서 지금의 나를 구축하는 요소 이외의 것들, 즉 나와는 상관없는 바를 의미한다. 박광선의 작업의 의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기억에 대한 본능의 의미를 추출하는 데 있다. 그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매체와 내부에 스며들어 있는 개인사, 기억의 결합으로 나눠서 이야기할 수 있다.

 

냉정한 거부
그가 합판을 작업의 소재로 삼은 이유는 캔버스가 너무 ‘매끄럽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캔버스의 여러 가지 특성에서 비롯됐다. 서구 미술사에서 캔버스는 평면작업에서 의례적으로 적용되어 왔고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는 신화화된 재료였다. 평면작업을 서구미술사에서는 ‘환영과의 투쟁’으로 정의한 것을 상기해 보면 실로 캔버스가 지닌 재료적 권위는 지금도 유효하다. 회화를 전공한 박광선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합판이 박광선이라는 작가를 정의하는 하나의 레테르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가 캔버스라는 재료를 거부했던 시점(時點)에 그는 이미 캔버스의 성질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박광선이 파악한 캔버스라는 재료는 매우 전형성을 띠는 것이었다. 화면의 상하가 이미 정해져 있는 방식은 그를 좀처럼 유혹할 수 없었다. 이미지 구축 방식이 이미 정해진 룰처럼 여겨졌던 셈이다. 그는 캔버스에 대해 이러한 생각으로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의 유년 시절 결핍에서 찾았다. 자연을 접할 수 있었던 성장 과정을 거쳤으나 주변의 조건이 편의를 위해 갖춰진 상황이 아니었다. 풍족한 일상은 보장되지 않았고 당연한 것은 없었다. 생물학적 육신의 성장은 이뤄졌지만 경험에 기반한 인식의 고취는 차별화되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그가 생활하면서 만났던 사람 간의 관계로 채워졌다.

그래서 그가 합판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대로 구획과 특정한 동선을 강제하는 도구로서 합판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의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구축한 공간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넘어설 수 없고 값싸지만 권위를 구축할 수 있다. 박광선이 합판을 대하는 태도 또한 거칠기 그지없다. 공구를 사용해 내려치거나 뜯어내는 등 세심함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분명한 분리의 지점을 마련하려는 단호함의 표명이다. 그 지점이 명확해지고 감정의 확산은 벽을 치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이렇듯 합판에 대한 박광선의 생각은 변화가 용이하고 경계감을 구축할 수 있다는 내용을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어느 날 그가 갑자기 깨달은 바가 아니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력을 경제적 가치와 환전했던 과정을 거치며 오랜 시간 관찰하면서 얻은 결과다. 그가 캔버스의 성질을 파악하고 ‘결국’ 그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다양한 매체 실험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주목했던 재료는 아사면 등 다소 거친 표면의 성질을 띠고 있던 것으로 캔버스 외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무엇인가 다른 재료를 갈구하던 그의 욕망이 투영됐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보통 회화 작업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출발하지만 그는 ‘어디에’라는 매개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창작의 주체가 떠올리는 대상과 벌어진 사건 혹은 관계를 시각화하고 그 상황에서 야기된 특정한 단상이 주제가 된다. 관람객은 작가와 대상 간 관계를 자신의 경험과 그로부터 생성된 기억의 톱니를 결합하여 특정한 상황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이 전형화되는 과정으로 수렴한다. 이때 시각화된 이미지의 구조가 때로는 난독의 상황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미적 체험과 다름없다. 이질적 간극이 새로운 기억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광선은 바로 이러한 미적 체험의 문법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기억을 전달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이에 매진한다.

 

슬픔의 역설
그가 합판 작업을 통해 제시하는 내용 중 가족이 있다. 실제 앨범에서 꺼낸 사진을 그대로 표현한 이 작업은 재료와 절묘하게 호응하며 저릿한 기억을 반추하고 있다. 사진으로만 남아 세상에 없는 이들을 추억하고 애도하는,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그의 운명과도 같다. 담담하게 개인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거친 외곽선은 재료의 특성을 드러내는 물성을 극대화하여 이뤄낸 탄식과 다름없다. 이처럼 작가의 은밀한 개인사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기억을 반추하는 일이란 앨범을 들춰보는 행위와 다름없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고,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박광선의 작업에서는 사진을 찍었던 그 순간의 기억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요소들이 기억을 조각(組閣)하고 전후 시간을 복원한다. 따라서 박광선이 작업의 주된 모티프로 사용하는 사진은 정지되어있는 시간의 기록이 아닌 등장인물과 벌인 사건이거나 경험한 사건이다. 여기서 사건은 이야기인데 그것은 온전히 그리고 왜곡 없이 인식되지 않는다.

박광선은 자신이 만드는 이야기를 어떠한 덧댐도 없이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그들을 신화화하지도 않고 작가에게 온기 어린 친절을 베풀지도 않는다.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미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극적이거나 염세적인 결말로 치닫지도 않는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
최근 변화된 박광선의 작업 추이를 글의 결말에 덧대려 한다. 필자는 박광선이 최근 기억을 수평선에 늘어놓는 작업이 아니라 수직으로 적층하는 작업으로 보여준다고 봤다. 결국 작가는 기억이란 최상부의 새로운 기억을 덮으면서 극복되고 망각의 수사를 붙일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영위하는 것으로 이룩할 수 있음을 토로했다.

또 그는 최근 조심스럽게 캔버스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위는 박광선이 만들어 낸 긴 붓대의 명징하지 않은 스트로크와 닮아있다. 잘 그렸다는 평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예술은 옳아도 옳지 않고 틀려도 틀리지 않으니 말이다. 단순히 그의 지금 행보를 ‘실험’이라는 진부한 단어로 옮기지는 않으련다. 오히려 그의 오류를 더욱 부추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것은 실패라는 의미와 등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지금껏 행해 왔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더 펼쳐내기를 바란다. 미시적인 그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정서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며 조금 더 보통의 삶에 습윤 하려 몸부림치길 바란다.

시간의 얼룩
황석권 《월간미술》 편집장

오랜 기억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곱씹어 보면 망각의 목적을 일깨우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그 이외의 기억은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 기억이란 대상과의 관계에서 지금의 나를 구축하는 요소 이외의 것들, 즉 나와는 상관없는 바를 의미한다. 박광선의 작업의 의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기억에 대한 본능의 의미를 추출하는 데 있다. 그것은 외부로 드러나는 매체와 내부에 스며들어 있는 개인사, 기억의 결합으로 나눠서 이야기할 수 있다.

 

냉정한 거부
그가 합판을 작업의 소재로 삼은 이유는 캔버스가 너무 ‘매끄럽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캔버스의 여러 가지 특성에서 비롯됐다. 서구 미술사에서 캔버스는 평면작업에서 의례적으로 적용되어 왔고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는 신화화된 재료였다. 평면작업을 서구미술사에서는 ‘환영과의 투쟁’으로 정의한 것을 상기해 보면 실로 캔버스가 지닌 재료적 권위는 지금도 유효하다. 회화를 전공한 박광선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합판이 박광선이라는 작가를 정의하는 하나의 레테르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가 캔버스라는 재료를 거부했던 시점(時點)에 그는 이미 캔버스의 성질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박광선이 파악한 캔버스라는 재료는 매우 전형성을 띠는 것이었다. 화면의 상하가 이미 정해져 있는 방식은 그를 좀처럼 유혹할 수 없었다. 이미지 구축 방식이 이미 정해진 룰처럼 여겨졌던 셈이다. 그는 캔버스에 대해 이러한 생각으로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의 유년 시절 결핍에서 찾았다. 자연을 접할 수 있었던 성장 과정을 거쳤으나 주변의 조건이 편의를 위해 갖춰진 상황이 아니었다. 풍족한 일상은 보장되지 않았고 당연한 것은 없었다. 생물학적 육신의 성장은 이뤄졌지만 경험에 기반한 인식의 고취는 차별화되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그가 생활하면서 만났던 사람 간의 관계로 채워졌다.

그래서 그가 합판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대로 구획과 특정한 동선을 강제하는 도구로서 합판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의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구축한 공간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넘어설 수 없고 값싸지만 권위를 구축할 수 있다. 박광선이 합판을 대하는 태도 또한 거칠기 그지없다. 공구를 사용해 내려치거나 뜯어내는 등 세심함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분명한 분리의 지점을 마련하려는 단호함의 표명이다. 그 지점이 명확해지고 감정의 확산은 벽을 치고 있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이렇듯 합판에 대한 박광선의 생각은 변화가 용이하고 경계감을 구축할 수 있다는 내용을 함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어느 날 그가 갑자기 깨달은 바가 아니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노동력을 경제적 가치와 환전했던 과정을 거치며 오랜 시간 관찰하면서 얻은 결과다. 그가 캔버스의 성질을 파악하고 ‘결국’ 그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다양한 매체 실험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주목했던 재료는 아사면 등 다소 거친 표면의 성질을 띠고 있던 것으로 캔버스 외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무엇인가 다른 재료를 갈구하던 그의 욕망이 투영됐다.

여기에서 하나 주목할 점은 보통 회화 작업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출발하지만 그는 ‘어디에’라는 매개체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창작의 주체가 떠올리는 대상과 벌어진 사건 혹은 관계를 시각화하고 그 상황에서 야기된 특정한 단상이 주제가 된다. 관람객은 작가와 대상 간 관계를 자신의 경험과 그로부터 생성된 기억의 톱니를 결합하여 특정한 상황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는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이 전형화되는 과정으로 수렴한다. 이때 시각화된 이미지의 구조가 때로는 난독의 상황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미적 체험과 다름없다. 이질적 간극이 새로운 기억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광선은 바로 이러한 미적 체험의 문법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기억을 전달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이에 매진한다.

 

슬픔의 역설
그가 합판 작업을 통해 제시하는 내용 중 가족이 있다. 실제 앨범에서 꺼낸 사진을 그대로 표현한 이 작업은 재료와 절묘하게 호응하며 저릿한 기억을 반추하고 있다. 사진으로만 남아 세상에 없는 이들을 추억하고 애도하는,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그의 운명과도 같다. 담담하게 개인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거친 외곽선은 재료의 특성을 드러내는 물성을 극대화하여 이뤄낸 탄식과 다름없다. 이처럼 작가의 은밀한 개인사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기억을 반추하는 일이란 앨범을 들춰보는 행위와 다름없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고, 없던 일로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박광선의 작업에서는 사진을 찍었던 그 순간의 기억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요소들이 기억을 조각(組閣)하고 전후 시간을 복원한다. 따라서 박광선이 작업의 주된 모티프로 사용하는 사진은 정지되어있는 시간의 기록이 아닌 등장인물과 벌인 사건이거나 경험한 사건이다. 여기서 사건은 이야기인데 그것은 온전히 그리고 왜곡 없이 인식되지 않는다.

박광선은 자신이 만드는 이야기를 어떠한 덧댐도 없이 있는 그대로 표출한다. 그들을 신화화하지도 않고 작가에게 온기 어린 친절을 베풀지도 않는다. 드라마에서나 등장할 미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극적이거나 염세적인 결말로 치닫지도 않는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
최근 변화된 박광선의 작업 추이를 글의 결말에 덧대려 한다. 필자는 박광선이 최근 기억을 수평선에 늘어놓는 작업이 아니라 수직으로 적층하는 작업으로 보여준다고 봤다. 결국 작가는 기억이란 최상부의 새로운 기억을 덮으면서 극복되고 망각의 수사를 붙일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영위하는 것으로 이룩할 수 있음을 토로했다.

또 그는 최근 조심스럽게 캔버스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행위는 박광선이 만들어 낸 긴 붓대의 명징하지 않은 스트로크와 닮아있다. 잘 그렸다는 평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예술은 옳아도 옳지 않고 틀려도 틀리지 않으니 말이다. 단순히 그의 지금 행보를 ‘실험’이라는 진부한 단어로 옮기지는 않으련다. 오히려 그의 오류를 더욱 부추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것은 실패라는 의미와 등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지금껏 행해 왔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더 펼쳐내기를 바란다. 미시적인 그의 이야기가 보편적인 정서를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며 조금 더 보통의 삶에 습윤 하려 몸부림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