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민선

무생물 주어

이해민선

이해민선의 작품세계는 황량한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을 장소라고 부르기도 어색할 만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는 종종 구덩이가 패여 물이 고여 있거나 높은 산등성이, 깎아낸 절벽, 붉은 색의 거대한 흙더미 등이 배경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버려진 나뭇가지, 조화, 비닐봉지 등을 폐노끈으로 묶어 만든 동물의 형상이나 붉은 흙덩어리 따위가 그냥 놓여 있기도 하다. 작가의 내면에 상존하고 있는 풍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 황량함은 그의 회화적 서사가 전개되는 무대의 원초적 아우라를 이룬다.

<무생물 주어>라는 이 전시는 크게 세 개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작가가 2013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낯선 노인들의 초상화를 그린 <Cast> 연작이다. 여기에 작가는 ‘나와 말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심장한 문구를 적어 놓았는데, 유령처럼 흐릿하게 뭉개어진 인물들의 표정에서 커다란 심리적 거리감과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종이 위에 그린 유화들로 이루어진 <무생물 주어>(2013-2017)라는 제목의 설치작품이다. 이 유화들은 바닥에 놓인 딱딱한 돌이나 콘크리트 조각들 그리고 예의 버려진 물건을 마치 초상화처럼 하나씩 그려 놓은 것으로, 각각의 뒷면에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지지대처럼 바닥에 꽂혀 있다. 마지막으로 흑연과 오일로 그린 <금 이빨을 잃어버린 자가 찾아온 곳>(2018)이라는 은유적 장면의 풍경화들이 있다. 산더미처럼 쌓인 돌무더기가 있고, 그 중 한 그림에는 무언가를 놓고 싸우는 듯한 두 인물이 앞쪽에 그려져 있으며, 다른 한 그림에는 주먹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닥에 쓰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인물들이 각각 작게 그려져 있다.

<무생물 주어>라는 전시명이 나타내듯, 이 작품들에는 인격인 동시에 인격에서 배제된 대상들이 등장한다. 노인들의 초상은 마치 콘크리트 파편이나 돌덩어리처럼 구체적인 표정을 잃은 채 초점 없는 시선을 가누고 있다. 또한 설치작품에서 하나씩 그려진 무기물들은 마치 인물화처럼 한 화면에 하나씩 담겨있지만, 그 역시 스티로폼 위에서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에 겨우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다. 돌무더기 그림에는 아무도 없다가 두 인물이 나타나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데, 이 인물들은 거대한 돌무더기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금 이빨을 잃어버린 자는 이미 돌무더기에 뒤섞여 찾을 수 없게 된 자신의 금 이빨로 인해 주체를 상실한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미술비평가 안소연이 언급했듯, 이들의 싸우는 팔 위에는 과일과 돌이 하나씩 올려져 있다. 이는 삶과 무기물 사이에서 명멸하는 이들의 존재에 대한 마지막 구원의 선택처럼 보인다.

이해민선의 회화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그의 필체이다. 마른 붓질로 대지의 헐벗은 결을 빠르게 표현하거나 계속해서 붓을 저어 만든 물감의 거품으로 흙의 질감을 표현해 내는 그의 방식은, 반투명하면서도 극도로 감정이 압축된 텅 빈 장소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하다. 이러한 공간은 전쟁, 재난, 공포, 추방, 소외, 상실과 같은 극적인 표제어들, 더 나아가 그 이후의 모두가 사라진 시간대를 떠올리게 한다. 남은 것은 몇 안되는 존재들과 비존재들 뿐인, 극도로 사실적인 디스토피아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회화적 텍스처가 드러내는 세계관은 주목할 만하다.

예술감독 유진상

“여기서, 내가 한참을 보고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뻗은 팔꿈치 위로 반듯하게 올려진 과일 하나.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균형을 이루듯 같은 무게로 그려진 돌멩이 하나. 이 뜻밖의 형태가 예상치 못한 곳에 아무렇지 않게 반듯이 놓인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없는 곳에 고립되어 있는 두 사람의 무의미한 행위가 그토록 작은 무게들을 지탱하려 애쓰는 것 같아 몹시 처연하기도 해서 나의 괜한 속내를 뒤적거리게 한다. 그러다가, 나는 이 형상 앞에서 오래 서성였을 그의 뒷모습을 다시 떠올려 본다. 붓과 연필을 번갈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두 사람이 마주잡은 팔꿈치 위에 과일 하나, 돌멩이 하나를 얌전하게 그려 넣기로 한 그의 속사정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가 찾던 곳도 여기였구나 싶다. 그림을 그리려는 자, 그가 찾아온 곳. 그것은, 도무지 알려져 있지 않고, 미비한 힘들이 교차하며, 아무에게나 함부로 들키지 않을, 묵직한 공허함이 짙게 배어 있는 ‘먼 곳’으로서의 장소다.”

안소연 (미술비평가), <그가 찾고 있는 것과 내가 보고 있는 것, 공백이 지닌 무게와 질감에 대하여>

이해민선
b. 1977
개인전
2021 <Decoy>, 페리지갤러리, 서울
2018 <야외>, 갤러리 소소, 파주
2017 <덩어리>, 플레이스 막, 서울
2015 <살갗의 무게>, 합정지구, 서울
2013 <물과 밥>, 아마도 예술 공간, 서울
2011 <덜 죽은 자들_묶인사이>, 닥터 박 갤러리, 양평
<덜 죽은 자들_직립식물>, 쌈지 논밭 갤러리, 파주
2010 <덜 죽은 자들_직립식물>,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2009 <덜 죽은 자들_기계와 기예>, 갤러리 그 문화, 서울
2008 <덜 죽은 자들_즙>, 갤러리 도올, 서울
2006 <임대 도시 공간 변이체>, 갤러리 킹, 서울
2005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아트스페이스 휴, 서울
2004 <안 유명한 작가의 개인전>, 갤러리 창, 서울
2인전
2020 <정직한 풍경>, 이해민선&최은경, 교보아트스페이스, 서울
<살, 몸, 벽>, 이해민선&정정엽, 갤러리 소소, 파주
2012 <사이의 변칙>, 이해민선&양정욱,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심상초등학교, 목포
<BGA SHOWROOM>, BGA 마루, 서울
2020 <동덕여대 큐레이터학과 졸업전: 나의 둘레는 멀고도 가까워서>, 온
2019 <사실 시체가 냄새를 풍기는 것은 장점이다>, 아트스페이스 풀, 서울
<바다는 가라앉지 않는다>, 세월호참사 5주기 전시, 안산
<DMZ>, 문화역서울 284, 서울
<말 그림자>, 성남아트큐브, 성남
2018 <자연스럽게>, 수원아이파크미술관, 수원
<풍경에서 명상으로>, 뮤지엄 산, 원주
<철-인>, 고려제강 F1963, 부산
<강원국제비엔날레: 악의 사전>, 녹색체험도시센터, 강릉
2017 <B컷 드로잉>, 금호 미술관, 서울
2016 <밤의 가장자리>, OCI 미술관, 서울
2015 <Real DMZ Project>, 아트선재센터·동송시내, 서울·철원
<서울루나포토페스티벌>, 이용재 건축사무소+side, 서울
2011 <해피윈도우>, 아트센터나비, 서울
<안녕없는 생활들, 모험들>,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0 <Planet: A 종의출현>, 일민미술관, 서울
2009 <Space A>, 공간 화랑, 서울
<Korean 4 Artists>, Gallery Fukuzum, 도쿄
2008 <창작 해부학>, 경기도미술관, 안산
<크리에이티브 마인드>, 사비나미술관, 서울
2007 <ART-LAN_ASIA>, ZAIM Gallery, 요코하마
<미술과 수학의 교감 Ⅱ>, 사비나미술관, 서울
2006 <젊은 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5 <서울청년미술제: 포트폴리오 2005>,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04 <광주비엔날레: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 광주비엔날레, 광주
<새로운 시각: 탈선>, 대안공간 풀, 서울
수상
2021 종근당예술지상, 종근당홀딩스
레지던시
2013 Stuttgart Museum of Art, 슈투트가르트
2012 MMCA-Asialink Art Space, 시드니
2012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고양
2009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서울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하나은행
삼성화재
(주)쌈지농부로부터
서울대학교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