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경

달빛이 가장 고요했던, 그 곳

전희경

전희경의 페인팅은 풍경을 다루고 있다. 제스추얼한 붓질이 강조된 추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을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작품의 제목이 풍경을 암시하는 것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의 그림들 속에서 각각의 붓질은 크기와 방향, 중첩과 원근으로 인해 거대한 야외의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그가 주로 사용하는 코발트, 울트라 마린, 셀룰리언 등의 풍부한 청색 계열의 물감들 및 그와 뒤섞이는 맑은 흰색으로 인해 그의 많은 그림들은 하늘과 구름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자연스럽게 구름들이 펼쳐진 푸른 색의 하늘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바다, 폭포, 분수 같은 대상들이 유동적인 역동성과 함께 캔버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들에서 구체적인 풍경의 묘사 혹은 재현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달빛이 가장 고요했던, 그곳> 역시 장소 혹은 풍경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빠르고 직관적인 각각의 붓질과 물감들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것들과 뒤섞이면서 회화적 자발성과 신체적 운동을 즉각적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회화적 접근 방식이 지닌 어려움은 정확성, 신속함, 판단력을 극적으로 요구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여기서 사용된 매체는 아크릴릭 물감이다. 금세 마를 뿐 아니라 배합 시 탁한 색을 만들어내는 아크릴 물감은 채도와 선명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전희경은 최대한 같은 계통의 색들을 인접하게 함으로써 채도와 선명도를 극대화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신이 사용하는 붓에 여러 물감을 동시에 묻혀 한 번에 칠하는, 마치 혁필화의 기법 같은 것을 사용하여 색조의 단순성을 극복하는 과감한 배합을 시도한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들로 인해 그의 화면은 고공의 비행기 창에서 내다본 것처럼 풍부한 색채의 그라데이션과 맑은 빛의 스펙트럼이 지배한다.

강렬한 신체의 움직임, 그로 인한 색채의 우발적 뒤섞임, 캔버스와 물감의 백색이 만들어내는 현란한 대기의 빛, 그리고 그 사이를 통해 드러나는 대지와 어둠의 짙은 질감. 전희경의 공간을 채우는 수증기들의 세계는 독자적 상상력이 자리 잡는 회화적 세계이자 주제이다. 예컨대, 2020년 작 <물방울이 모이는 세계>는 그 제목에서 이러한 세계관을 가리키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미래’라는 주제가 종종 등장하는데, 그 ‘미래의 어느 날’은 구름들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빛에 의해 멀리 보라색의 무지개가 떠오르는 낙원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날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 연작은 실제의 달 대신 둥근 캔버스에 그가 이제까지 그려온 이상향의 풍경들을 그린 것이다. 전희경의 추상표현적 회화가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혹은 ‘여전히 닿지 않는’ 세계의 아름다움이다. 달은 항상 보이는 곳에 있지만 닿지 않는 존재이자 장소의 기호인 셈이다. 달에 이상향을 투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으로, 전희경의 회화에서는 매우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달빛이 가장 조용했던’이라는 과거형의 지시는 그 장소의 소멸 뿐 아니라 그것이 기억의 형태로 지속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작가는 쉼표와 더불어 ‘그곳’을 떠올림으로써 자신의 회화가 그 장소성에 수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예술감독 유진상

전희경의 색은, 붓질과 밀접하게 만들어진다. 물론, 다른 작가들의 작품 역시, 색을 만드는 것은 그들의 붓이다. 하지만, 그 붓으로 어떻게 색의 이야기를 지어내느냐 하는 것은 소설가들의 문체가 서로 다르고, 가수들만의 독특한 음색이 있는 것과 같다. 사실적인 재현작업을 하는 작가들도 다 다른 붓질과 색을 갖는다. 하물며, 색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추상작가들에게 붓과 색의 관계는, 그리는 행위의 전부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임대식 (아터테인 대표), <달빛이 가장 고요했던, 그 곳>

전희경
b. 1981
개인전
2021 <Flat Calm>, 아터테인, 서울
2020 <달빛이 가장 고요했던, 그곳>, 아터테인, 서울
2019 <안온한 세계>, (구)떡집, 안산
2018 <바람이 구름을 걷어 버리듯>, 신한갤러리 역삼, 서울
2015 <정신의 향연>, 이랜드스페이스, 서울
2014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겸재정선 미술관,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공기의 모양>, 정서진아트큐브, 인천
<ABSTRACT-ING>, 신세계 갤러리 센텀, 부산
2020 <숨쉬다>, DTC아트센터, 대전
<문턱만 닳도록>, 세마창고, 서울
<OP.23 NO.8 In A FLAT MAJOR>, 오브, 서울
2019 <서울로미디어캔버스>, 서울만리동광장, 서울
수상
2015 헬로우아티스트, 네이버문화재단
에트로 미술상, 은상, 백운갤러리
2013 내일의 작가, 대상, 겸재정선미술관
레지던시
2017-2020 경기창작센터, 안산
2013 Guandu Residency, Guandu Art Museum, 타이페이
2012 Taitung Art Museum, 타이동
2011 오픈 스페이스 배, 부산
2009 Bundanon Trust, 뉴사우스웨일스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백운갤러리
이랜드문화재단
겸재정선미술관
타이동미술관

눈앞에 드리워진 폭포
안소연 (미술비평가)

세로로 길게 세운 열 폭의 회화 연작에 전희경은 <연속적 블루>(2021)라는 제목을 붙였다. 세로 화면의 수직성을 강조하되 그것과 반목하여 파노라마처럼 옆으로 펼쳐진 그림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파란색은 무엇인가? 강렬한 붓질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추상성에 사로잡혀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위아래로 훑다가 어떤 잔상 같은 색이 혹은 형상이 아니면 빛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 같음을 느끼면서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면, 산과 폭포가 화면을 뚫고 나온 파란색의 윤곽을 차지하고 있다. 화폭을 채운 역동적인 붓질의 추상성은 파란색이 아우르는 화면의 깊이와 교차하면서 구름과 폭포와 빛을 머금은 산의 모양을 감았다 뜬 두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한다. 그것은 이제 풍경 회화로서 열 폭의 화면에서 시공간에 대한 시각적 깊이를 드러낸다.

전통 산수화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연속적 블루>에 대한 인상을 묻자, 전희경은 상상 속 산행의 여정을 담아낸 그림의 정황에 관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상상을 ‘관념(觀念)’이라는 단어와 중첩시켜 말하면서, 그가 그린 이 회화 연작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념적인 풍경화라고 했다. 애초에 구체적인 현실 풍경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는 관념에 대한 시각적 표상을 좇아 폭포가 드리워진 이 파란색의 풍경 앞에 당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 그것은 현실 세계가 아닌 곳 혹은 현실 바깥의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대한 상상적 인식을 촉발시킨다.

이때 전희경이 자신의 관념적 풍경화를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의 맥락에 빗대어 설명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서너 차례 정선을 언급했다. 정선이 그린 금강 진경을 떠올리며, 옛 선비 화가가 명산을 여행하며 그것의 참모습을 스물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사건을 마치 자신의 열 폭 풍경 회화의 숨은 사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회상했다. 그에게서 금강산을 보고 와 그 풍경과 멀리 떨어진 자신의 처소에서 ‘본 것’을 다시 생각하며 화폭에 그린 정선에 대한 지극한 공감이 엿보였다. 그에게 그가 본 것에 대해 다시 묻자, 어떤 긴 여정에서 대면한 낱낱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니라 했다. 그는 오히려 정선이 그린 금강 진경을 하나의 실마리로 삼아 폭포처럼 드리워진 마음속 어떤 장면을 풀어낼 임의의 화폭을 얻어낸 것 같았다. 전희경은 마치 산 아래에서 시작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현실 바깥의)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하며 그 만물을 둘러싼 파란색 대기를 보고 만진 것처럼 풍경에 압도된 신체의 감각을 색채와 깊이로 나타냈다. 그는 화면 안에 ‘공간’을 만들어 내려 했다는데, 그 공간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이 하나의 세계로 가시화되기 위한 조건이자 물성을 통한 회화적 깊이와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희경의 회화에서는 이 둘이 큰 시차 없이 교차하며, 각각의 공간적 역량을 지속적으로 재조정해 나간다.

매우 빠르고 즉흥적인 행위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마흔의 봄> 연작은, 사실 아주 느리고 신중한 사유를 쫓아 살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걷는 육체의 움직임을 함의하고 있다. 큰 붓이 캔버스와 한 사람의 육체 사이에서 휙 하고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이 그림에서 그 붓질이 유일한 행위로 보이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전희경은 그가 관념이라고 불렀던 머릿속의 상상, 빈 캔버스 앞에서 허공에 그려낸 그 신중하고 오래된 생각의 단상이 정사각형의 그리드 안에 진입하기 위해 수없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공간의 경로를 만든다. 이를테면 <바람에 대한 연구>(2019)와 <공기에 대한 연구>(2019)에서도 전희경은 특유의 붓질, 정확히 말하면 고무 롤러 같은 스퀴지(squeegee)나 폭이 긴 도배용 솔 같은 것을 각목에 대고 더 길게 이어 만든 도구로 물감을 묻혀 그가 선택한 (적당한) 화면에 제스처의 흔적을 깊숙이 남겨 놓았다.

<마흔의 봄> 연작이나 <바람에 대한 연구>와 <공기에 대한 연구> 같은 작업은 커다란 붓질과 물성이 회화의 공간을 더할 나위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전희경은 스스로 관념이라 생각해 온 상상적 실체에 대해 ‘감각 지각(sensual perception)’을 매개할 현상적인 경험을 투영해 놓고, 그것을 포괄하는 시각적 표현/표상으로서 회화적 공간을 구축해낼 방도를 모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실체를 갖고 있는 구체적인 풍경에서 출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추상적이거나 비가시적인 존재에 대해 자신이 겪은 감각 지각에 의한 통찰로 그것을 마치 실재하고 있는 풍경처럼 회화적 공간 안에서 깊이를 나타내는 임의의 형상으로 탐구해 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현실적이고 비가시적인 추상적 사고는 그의 머릿속에 맴돌다가 자신의 체화된 감각 지각에 의해 눈앞에 드리워진 폭포 같은 가림막을 뚫고 혹은 그것이 감싸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형태로 우리의 시각적 깊이의 회복을 촉구하는 셈이다.

정선은 평생에 걸쳐 금강산의 참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젊어서 금강산을 유람하며 관념을 벗어난 진경에 몰두했던 것과 비교해, 노년의 정선은 그가 몇 차례 직접 여행하며 마주했던 금강의 풍경을 떠올리며 추상적으로 풀이했다. 그가 “본 것”에 대한 기억이자 전적으로 그의 육체가 산속에 감춰진 풍경과 마주했을 때의 신비로운 감각적 지각을 다시 어둠 속에서 끌어내 화폭에 자기 자신과 그 대상 사이에 놓였던 공간의 깊이로 재해석한 추상적 사유는, 전희경의 <연속적 블루>가 지닌 함의와 닿아 있는 듯하다.

열 폭의 <연속적 블루>는 전희경이 상상한 풍경이다. 그 상상은 비가시적 현존을 구체화하며, 나아가 진경으로서의 현실 풍경 너머에 대해 일종의 ‘초과하는’ 감각을 명시해준다. 말하자면 정선이 금강산 골짜기를 직접 걸으며 눈으로 관찰했던 진경으로서의 풍경이 그 대상의 참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전희경은 정선이 노년에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며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풍경의 참모습을 또다시 이해하려 했던 추상적인 태도와 닮아 있다. 그런 까닭에 <연속적 블루>는 눈앞에 폭포와 구름과 안개가 드리워진 청록색 산의 전경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전형적인 산수화의 수사적 시공간을 자신의 회화적 시공간의 토대로 불러온 전희경은 정작 감각적 지각과 추상적 사유 그 자체의 현존을 구현할 회화적 감각을 찾고 있는 셈이다. <연속적 블루>는 그러한 감각과 지각의 연쇄를 색채가 만들어내는 회화적 시공간에 대한 경험으로 옮겨 사실상 숭고한 이상향에 대비되는 ‘죽음’의 불확실성까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주체의 근원적인 경험을 ‘볼 수 있음’에 대한 시각적 해방으로 전이시켜 놓으려는 맥락을 드러낸다.

눈앞에 드리워진 폭포
안소연 (미술비평가)

세로로 길게 세운 열 폭의 회화 연작에 전희경은 <연속적 블루>(2021)라는 제목을 붙였다. 세로 화면의 수직성을 강조하되 그것과 반목하여 파노라마처럼 옆으로 펼쳐진 그림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파란색은 무엇인가? 강렬한 붓질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추상성에 사로잡혀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위아래로 훑다가 어떤 잔상 같은 색이 혹은 형상이 아니면 빛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 같음을 느끼면서 눈을 몇 번 감았다 뜨면, 산과 폭포가 화면을 뚫고 나온 파란색의 윤곽을 차지하고 있다. 화폭을 채운 역동적인 붓질의 추상성은 파란색이 아우르는 화면의 깊이와 교차하면서 구름과 폭포와 빛을 머금은 산의 모양을 감았다 뜬 두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한다. 그것은 이제 풍경 회화로서 열 폭의 화면에서 시공간에 대한 시각적 깊이를 드러낸다.

전통 산수화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연속적 블루>에 대한 인상을 묻자, 전희경은 상상 속 산행의 여정을 담아낸 그림의 정황에 관해 말했다. 그는 자신의 상상을 ‘관념(觀念)’이라는 단어와 중첩시켜 말하면서, 그가 그린 이 회화 연작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념적인 풍경화라고 했다. 애초에 구체적인 현실 풍경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는 관념에 대한 시각적 표상을 좇아 폭포가 드리워진 이 파란색의 풍경 앞에 당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재하지 않는 세계, 그것은 현실 세계가 아닌 곳 혹은 현실 바깥의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대한 상상적 인식을 촉발시킨다.

이때 전희경이 자신의 관념적 풍경화를 정선의 진경(眞景)산수화의 맥락에 빗대어 설명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서너 차례 정선을 언급했다. 정선이 그린 금강 진경을 떠올리며, 옛 선비 화가가 명산을 여행하며 그것의 참모습을 스물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사건을 마치 자신의 열 폭 풍경 회화의 숨은 사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회상했다. 그에게서 금강산을 보고 와 그 풍경과 멀리 떨어진 자신의 처소에서 ‘본 것’을 다시 생각하며 화폭에 그린 정선에 대한 지극한 공감이 엿보였다. 그에게 그가 본 것에 대해 다시 묻자, 어떤 긴 여정에서 대면한 낱낱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니라 했다. 그는 오히려 정선이 그린 금강 진경을 하나의 실마리로 삼아 폭포처럼 드리워진 마음속 어떤 장면을 풀어낼 임의의 화폭을 얻어낸 것 같았다. 전희경은 마치 산 아래에서 시작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현실 바깥의) 또 다른 세계와 마주하며 그 만물을 둘러싼 파란색 대기를 보고 만진 것처럼 풍경에 압도된 신체의 감각을 색채와 깊이로 나타냈다. 그는 화면 안에 ‘공간’을 만들어 내려 했다는데, 그 공간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이 하나의 세계로 가시화되기 위한 조건이자 물성을 통한 회화적 깊이와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희경의 회화에서는 이 둘이 큰 시차 없이 교차하며, 각각의 공간적 역량을 지속적으로 재조정해 나간다.

매우 빠르고 즉흥적인 행위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마흔의 봄> 연작은, 사실 아주 느리고 신중한 사유를 쫓아 살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걷는 육체의 움직임을 함의하고 있다. 큰 붓이 캔버스와 한 사람의 육체 사이에서 휙 하고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이 그림에서 그 붓질이 유일한 행위로 보이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전희경은 그가 관념이라고 불렀던 머릿속의 상상, 빈 캔버스 앞에서 허공에 그려낸 그 신중하고 오래된 생각의 단상이 정사각형의 그리드 안에 진입하기 위해 수없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공간의 경로를 만든다. 이를테면 <바람에 대한 연구>(2019)와 <공기에 대한 연구>(2019)에서도 전희경은 특유의 붓질, 정확히 말하면 고무 롤러 같은 스퀴지(squeegee)나 폭이 긴 도배용 솔 같은 것을 각목에 대고 더 길게 이어 만든 도구로 물감을 묻혀 그가 선택한 (적당한) 화면에 제스처의 흔적을 깊숙이 남겨 놓았다.

<마흔의 봄> 연작이나 <바람에 대한 연구>와 <공기에 대한 연구> 같은 작업은 커다란 붓질과 물성이 회화의 공간을 더할 나위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전희경은 스스로 관념이라 생각해 온 상상적 실체에 대해 ‘감각 지각(sensual perception)’을 매개할 현상적인 경험을 투영해 놓고, 그것을 포괄하는 시각적 표현/표상으로서 회화적 공간을 구축해낼 방도를 모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실체를 갖고 있는 구체적인 풍경에서 출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추상적이거나 비가시적인 존재에 대해 자신이 겪은 감각 지각에 의한 통찰로 그것을 마치 실재하고 있는 풍경처럼 회화적 공간 안에서 깊이를 나타내는 임의의 형상으로 탐구해 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현실적이고 비가시적인 추상적 사고는 그의 머릿속에 맴돌다가 자신의 체화된 감각 지각에 의해 눈앞에 드리워진 폭포 같은 가림막을 뚫고 혹은 그것이 감싸고 있는 어떤 근원적인 형태로 우리의 시각적 깊이의 회복을 촉구하는 셈이다.

정선은 평생에 걸쳐 금강산의 참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젊어서 금강산을 유람하며 관념을 벗어난 진경에 몰두했던 것과 비교해, 노년의 정선은 그가 몇 차례 직접 여행하며 마주했던 금강의 풍경을 떠올리며 추상적으로 풀이했다. 그가 “본 것”에 대한 기억이자 전적으로 그의 육체가 산속에 감춰진 풍경과 마주했을 때의 신비로운 감각적 지각을 다시 어둠 속에서 끌어내 화폭에 자기 자신과 그 대상 사이에 놓였던 공간의 깊이로 재해석한 추상적 사유는, 전희경의 <연속적 블루>가 지닌 함의와 닿아 있는 듯하다.

열 폭의 <연속적 블루>는 전희경이 상상한 풍경이다. 그 상상은 비가시적 현존을 구체화하며, 나아가 진경으로서의 현실 풍경 너머에 대해 일종의 ‘초과하는’ 감각을 명시해준다. 말하자면 정선이 금강산 골짜기를 직접 걸으며 눈으로 관찰했던 진경으로서의 풍경이 그 대상의 참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전희경은 정선이 노년에 자신의 경험을 회상하며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풍경의 참모습을 또다시 이해하려 했던 추상적인 태도와 닮아 있다. 그런 까닭에 <연속적 블루>는 눈앞에 폭포와 구름과 안개가 드리워진 청록색 산의 전경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전형적인 산수화의 수사적 시공간을 자신의 회화적 시공간의 토대로 불러온 전희경은 정작 감각적 지각과 추상적 사유 그 자체의 현존을 구현할 회화적 감각을 찾고 있는 셈이다. <연속적 블루>는 그러한 감각과 지각의 연쇄를 색채가 만들어내는 회화적 시공간에 대한 경험으로 옮겨 사실상 숭고한 이상향에 대비되는 ‘죽음’의 불확실성까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주체의 근원적인 경험을 ‘볼 수 있음’에 대한 시각적 해방으로 전이시켜 놓으려는 맥락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