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원

알레고리 : 뾰족한 것과 매끄러운 것

최지원

최지원은 인형을 그린다. 그가 그리는 인형은 보통 ‘Porcelain Doll’ 또는 ‘Bisque Doll’ 또는 ‘China Doll’이라고 불리는 인형으로 1840년대부터 주로 독일 튀링겐(Türingen)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German Bisque Doll’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금은 고미술 수집품으로 분류될 만큼 고급 공예품에 속하는 이 도자기 인형은 1860년대에서 1900년대 사이에 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유행했다. 최지원이 그리는 인형은 안와(orbit)를 위한 구멍과 함께 안구가 따로 제작되어 있지 않은, 매끈한 자기의 표면 위에 눈을 그려넣은 보다 단순한 형태의 인형이다. 앤틱의 경우, 눈썹이나 눈의 형태, 입술의 모양 등으로 어느 회사에서 생산된 것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대체로 도자기 인형은 어깨와 가슴 윗부분, 손, 발 등 노출부위만 도자기로 만들고, 나머지 신체는 천을 이용하여 봉제로 제작되어 있다. 최지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주로 얼굴이나 상반신만 그려져 있으며 표정이나 눈, 입의 형태는 상당히 무표정한 편으로 다른 인형들에 비해 입꼬리 부분이 비교적 아래로 처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눈동자가 일반적인 도자기 인형들에 비해 작고 흐릿한 회색으로 그려져 있는 점을 특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형들을 발그레한 붉은 뺨을 지니고 있다. 뺨의 홍조는 이들이 내면에 감추고 있는 감정적 동요의 유일하고도 공통된 단서이다.

 

도자기 인형의 각 생산업체 구분에 관해서는 다음의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https://quintessentialantiquedolls.wordpress.com/the-makers-seven-german-porcelain-factories-that-produced-china-dolls-and-identifying-their-dolls/

2020년 5월에 디스위켄드룸 갤러리에서 열린 <Cold Flame 차가운 불꽃>전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최지원의 도자기 인형 연작은 2019년 가을부터 제작된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매우 짙은 단색의 배경을 바탕으로 밝은 실내의 조명에 의해 매끈하게 반들거리는 도자기 인형의 표면은 특유의 깨지기 쉬울 것 같은 단단한 질감과 부드러운 굴곡의 반사에 의해 순수하고 무결한 인상을 자아낸다. 게다가 이 인형들이 나타내고 있는 인물상은 아이들의 장난감을 위한 순진무구한 존재들이라기보다는, 마치 성모 마리아 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성숙한 여성의 모습이다. 2019년 작 <우는 여인>에서는 실제로 성모 현현(Epiphany)을 떠올리는, 눈물 흘리는 도자기 얼굴이 묘사되어 있다. 작가의 많은 작품들에서 도자기 인형은 마치 초자연적인 소설에서처럼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몇몇 작품에서는 실제로 움직이기도 한다. 2019년 작 <무제>에서는 도자기 인형이 자신의 흐릿한 눈동자에 직접 뚜렷한 동공을 지닌 갈색의 컬러 컨택트 렌즈를 넣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인형들이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흐릿한 눈동자를 지닌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흐릿한 (혹은 작은) 눈동자와 무표정한 입꼬리를 지닌 이 여성상은 이제 20대 중반의 작가가 자신과 자신의 또래 여성들에게 투영하는 전형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매끄럽고 단단한 도자기 인형의 얼굴이 그러하듯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종종 그의 그림에서 이 여성들은 자주 두 명 씩 등장하곤 하는데, 이들은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특히 관객들)에게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들이다. 작가가 이들로 하여금 정면을 바라보거나 측면을 바라보게 하는 방식 역시 이 무표정한 인형들로부터 내면적 서사를 이끌어내는 방법 중 하나이다. 물론 더 여러 명이 등장할 때도 있는데, 예컨대 2019년 작 <관조적 대상>에서 왼쪽의 인물은 반대쪽의 네 명의 인물들을 마주보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쏟아지는 눈물은 예외적인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관객들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서로 마주보면서 자신들끼리의 교감을 통해서만은 이러한 표현을 드러내는 것이다.

2021년에 그려진 <뾰족한 것들의 방해> 연작은 크게 클로즈업된 얼굴 한가운데를 가리고 있는 식물의 줄기를 강조하여 다루고 있다. 분홍 가시꽃이나 긴잎 아카시아처럼 보이는 이 식물들이 상징하는 것은 비-실존적인 도자기 인형의 내면을 가로지르는 생생하거나 격렬한 감정일 것이다. <가시꽃과 여인>에서는 붉고 아름다운 가시꽃과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난 그것의 줄기가 검은 옷을 입은 여인상 뒤에 과장되었을 정도로 크게 그려져 있다. <포개진 붉은 방>은 관객의 시선을 피해 오른편을 바라보는 붉은 옷의 두 여성 옆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 난초가 피어있다. 반면 <멜랑콜리아>에서는 한가운데의 밤하늘에 떠있는 밝은 보름달을 통해 앞부분에서 역광을 받고 있는 여인들의 심리적 동요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작들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빈번한 알레고리의 사용은 도자기 인형으로 대치된 여성상과 댓구를 이루면서 미묘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변주들로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도자기 인형들의 사실적 존재감을 통해 극적인 감정을 극대화하는 연출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쉽고 가볍게 소비된 후 신속하게 폐기되는 ‘요즘의 ’감정들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아름답지만, 부주의하면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마는 도자기 인형의 시각적 특성을 대상에 입혀, 폭죽이 터져도 반응하지 않고, 으슥한 숲길에서도 담대하게 걸을 수 있는 무감각한 표정의 인물들을 그려냈다. 작가가 도자기 인형의 제작 공정이나 물성을 깊이 연구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건 그녀에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단지 고민한 것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고민을 거쳐 탄생한 작가의 ‘매끈하게 빛나는 도자기 인물’들은 작품 속에서 그녀가 그리고자 했던 바로 그 ‘요즘의 감정’을 충실히, 그리고 영리하게 전달한다.”

이가현

최지원
b.1996
개인전
2020 <Cold Flame>, 디스위켄드룸,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0인칭의 자리>, 디스위켄드룸, 서울
<연기와 연기>, 상업화랑, 서울
2020 <Fair Play!>, 디스위켄드룸, 서울
2019 <의미있는 중얼거림>, 복합문화공간에무, 서울
<제4회 COSO청년작가 기획전>, 서울
<이화아트파빌리온 개관기념전: Switch On>, 이화아트파빌리온, 서울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아마도 누군가의 오늘: 최지원의 회화에 관하여
박지형(독립 큐레이터)

최지원이 무엇을 그렸는지 나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반짝이는 질감을 가진 인형, 서로 다른 표정과 의상, 그리고 주변에 놓인 묘한 풍경과 사물들. 그런데 왜 이들 그림 앞에서 떠올렸던 생각이 문장이 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이는 어쩌면 명확한 형상 뒤에 감춰진 개념적, 감각적 그리고 역사적 맥락이 여러 층위를 갖고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필자는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통시적인 문장보다는 조각난 경험의 단상을 몇몇 단어와 구절로 나열해 보며 그의 작업 세계로 연결되는 문을 두드리려 한다.

하나, 기피하는 대상들. 공예와 순수 미술이 서로를 탐닉하면서도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의 지속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작가의 행보는 역사적 인식의 관습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는 수공예품의 일종인 낡은 도자 인형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직물 패턴이나 자연물과 같은 요소와 적극적으로 접붙이며 현재의 메시지를 써 내려간다. 도자기 장식품, 이들이 걸치고 있는 옷, 주변에 놓인 장식품들은 한편으로 회화가 오랫동안 기피하거나 터부시했던 것이다. 또한 공예품은 당대의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함의하는 코드로 여겨지며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의미의 절대성과는 다소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실용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띠는 물건(꽃과 자연물, 카펫, 레이스가 달린 의상, 장식품 등)은 작가에 의해 회화의 주관적 도상으로 재인용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둘, 이름 없는 초상과 비초상 사이. 그의 작업 앞에서 ‘누구’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묘하게 조금씩 다른 인상을 지닌 얼굴을 가면을 쓴 인격체라고 상상해 보더라도 여전히 이들에게는 명명할 수 있는 각각의 이름이 부재한다. 더군다나 작가가 특정한 인물을 보거나 상정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무엇’의 형체를 닮게 그려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들 그림은 인물화의 의미로부터 훌쩍 멀어진다. 이들을 초상화의 범주에 집어넣기에는 영 껄끄러운 구석이 있는 것이다. 다만 누구 혹은 무엇으로 단정 지어지기 이전의 (혹은 그렇게 될 수 없는) 대상들은 인격적 주체와 비주체 사이의 위치를 계속해서 새로 고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초상화가 그러하듯 당대의 시대상을 표상하는 지표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고 있다. 표정을 띤 물건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감각적 양태를 표상하는 기호가 되며 화면의 서사를 상상하게끔 하는 실마리가 된다.

셋, 오작동하는 빛의 논리. 빛은 회화의 근원적 동력이자 전제 조건이며, 오랜 시간 예술가들에게 도전과 실험의 과녁이 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최지원의 작품에서 빛은 다수의 역할을 수행한다. 먼저 그려지는 윤곽의 질감을 표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반짝거림, 즉 도자기 표면의 반사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 출발하는 광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가 만들어 내는 화면 안에는 빛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얼굴에 드리운 옅은 음영과 형체의 외곽선을 따라 슬그머니 채워진 역광의 색채는 프레임 속 대상을 더욱 살아있는 무엇으로 보이게끔 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그림은 빛이 부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는 입체적인 인형의 형체 뒤에 들어찬 납작한 색면, 캔버스 평면 뒤를 암시할 수 없도록 하는 장막과 문양, 도드라지는 옷의 패턴이 보여주는 평면적인 질감으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마치 서로 다른 차원에 머물던 이미지들이 콜라주처럼 재구성된 듯한 이질감을 준다. 이는 캔버스 위에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 작가가 포토샵 등 디지털 툴로 수집한 사진 조각들을 잘라 배치해 보고 이로부터 회화의 완결된 장면을 상상하는 제작의 과정에서 기인하는 효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적인 표현이 의도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엇갈리는 명암의 부자연스러움은 분명 그림 전체의 질감과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어딘가 불안정한 빛의 축과 어설픈 듯 이어 붙여진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넷, 오늘을 표상하는 도상. 최지원의 그림에는 미술사적 참조를 기반으로 했을 법한 지표가 여럿 삽입되어 있다. 특히 16, 17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평범한 물건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그려졌던 바니타스화의 의미를 상기해 본다. 바니타스화는 텅 빈 삶의 유한성을 정적인 사물로 대치해 보여주고자 한 방법론적 시도였다. 그의 회화 역시 동시대 개개인의 삶의 전반에 스며든 무감각함과 고립감을 드러내기 위해 무생물과 인공적인 도상들을 선택하고 있다. 도자기 인형, 닫힌 방, 달, 가시꽃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한 것들은 숨가쁘게 흐르는 시류와 수많은 자극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과 연결을 갈망하는 듯 프레임 밖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은 같은 시공을 공유하는 우리에게 공감의 정서를 전달한다.

다섯, 내재한 위험과 텅 빈 욕망. 작가가 빚어내는 윤곽에서 감지되는 감수성의 지류는 양가적이다. 무엇보다 도자기의 부드러운 광택은 자신의 화려하고 밝은 면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현실과 동일시되는 요즘 모든 일상은 매끄럽게 윤색되며 선택적으로 업로드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매끈함은 속이 비어 있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균열이 가는 도자기의 연약한 속성을 관통한다. 텅 빈 욕망의 조각들은 외부의 시선이나 도처에 내재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그 때문에 늘 불안한 감정 위에서 발현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은 그의 작업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응축되어 나타나며, 표정이 없는 인형은 위협에 놀라거나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를 허무주의적인 맥락으로 읽어 내기에는 여전히 개체 내면에 형용할 수 없는 욕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여전히 남은 질문은 그림에 투사된 많은 도상이 어떻게 이야기를 지속해 갈 것인가에 관한 것일 테다. 작가는 동시대의 사회적 욕망을 투사하는 매개로서 도자기라는 사물과 각색된 풍경을 선택했다. 인간의 감각과 주체성을 대변하는 인형은 그의 회화에서 불현듯 등장했고, 그는 자의적으로 연출한 상황에 개체를 집어넣거나 또 다른 얼굴과 계속해서 마주치도록 하면서 서사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의 회화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자연물과 인공물, 낮과 밤, 개인과 공동체, 단절과 연대 등 결이 다른 두 힘은 계속해서 서로를 끌어당기며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최지원이 그려 가는 세계는 우리 앞에 당면한 현실을 조금씩 더 선명하게 짚어보고 있다.

아마도 누군가의 오늘: 최지원의 회화에 관하여
박지형(독립 큐레이터)

최지원이 무엇을 그렸는지 나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반짝이는 질감을 가진 인형, 서로 다른 표정과 의상, 그리고 주변에 놓인 묘한 풍경과 사물들. 그런데 왜 이들 그림 앞에서 떠올렸던 생각이 문장이 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이는 어쩌면 명확한 형상 뒤에 감춰진 개념적, 감각적 그리고 역사적 맥락이 여러 층위를 갖고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필자는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통시적인 문장보다는 조각난 경험의 단상을 몇몇 단어와 구절로 나열해 보며 그의 작업 세계로 연결되는 문을 두드리려 한다.

하나, 기피하는 대상들. 공예와 순수 미술이 서로를 탐닉하면서도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의 지속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작가의 행보는 역사적 인식의 관습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는 수공예품의 일종인 낡은 도자 인형의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직물 패턴이나 자연물과 같은 요소와 적극적으로 접붙이며 현재의 메시지를 써 내려간다. 도자기 장식품, 이들이 걸치고 있는 옷, 주변에 놓인 장식품들은 한편으로 회화가 오랫동안 기피하거나 터부시했던 것이다. 또한 공예품은 당대의 특정한 문화적, 역사적 정체성을 함의하는 코드로 여겨지며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의미의 절대성과는 다소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실용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띠는 물건(꽃과 자연물, 카펫, 레이스가 달린 의상, 장식품 등)은 작가에 의해 회화의 주관적 도상으로 재인용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둘, 이름 없는 초상과 비초상 사이. 그의 작업 앞에서 ‘누구’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묘하게 조금씩 다른 인상을 지닌 얼굴을 가면을 쓴 인격체라고 상상해 보더라도 여전히 이들에게는 명명할 수 있는 각각의 이름이 부재한다. 더군다나 작가가 특정한 인물을 보거나 상정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무엇’의 형체를 닮게 그려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들 그림은 인물화의 의미로부터 훌쩍 멀어진다. 이들을 초상화의 범주에 집어넣기에는 영 껄끄러운 구석이 있는 것이다. 다만 누구 혹은 무엇으로 단정 지어지기 이전의 (혹은 그렇게 될 수 없는) 대상들은 인격적 주체와 비주체 사이의 위치를 계속해서 새로 고침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초상화가 그러하듯 당대의 시대상을 표상하는 지표로서의 기능을 잃지 않고 있다. 표정을 띤 물건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감각적 양태를 표상하는 기호가 되며 화면의 서사를 상상하게끔 하는 실마리가 된다.

셋, 오작동하는 빛의 논리. 빛은 회화의 근원적 동력이자 전제 조건이며, 오랜 시간 예술가들에게 도전과 실험의 과녁이 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최지원의 작품에서 빛은 다수의 역할을 수행한다. 먼저 그려지는 윤곽의 질감을 표현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전제가 된다. 반짝거림, 즉 도자기 표면의 반사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디에선가 출발하는 광원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가 만들어 내는 화면 안에는 빛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얼굴에 드리운 옅은 음영과 형체의 외곽선을 따라 슬그머니 채워진 역광의 색채는 프레임 속 대상을 더욱 살아있는 무엇으로 보이게끔 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그림은 빛이 부재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는 입체적인 인형의 형체 뒤에 들어찬 납작한 색면, 캔버스 평면 뒤를 암시할 수 없도록 하는 장막과 문양, 도드라지는 옷의 패턴이 보여주는 평면적인 질감으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마치 서로 다른 차원에 머물던 이미지들이 콜라주처럼 재구성된 듯한 이질감을 준다. 이는 캔버스 위에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 작가가 포토샵 등 디지털 툴로 수집한 사진 조각들을 잘라 배치해 보고 이로부터 회화의 완결된 장면을 상상하는 제작의 과정에서 기인하는 효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적인 표현이 의도되었건 그렇지 않았건 엇갈리는 명암의 부자연스러움은 분명 그림 전체의 질감과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어딘가 불안정한 빛의 축과 어설픈 듯 이어 붙여진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넷, 오늘을 표상하는 도상. 최지원의 그림에는 미술사적 참조를 기반으로 했을 법한 지표가 여럿 삽입되어 있다. 특히 16, 17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평범한 물건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그려졌던 바니타스화의 의미를 상기해 본다. 바니타스화는 텅 빈 삶의 유한성을 정적인 사물로 대치해 보여주고자 한 방법론적 시도였다. 그의 회화 역시 동시대 개개인의 삶의 전반에 스며든 무감각함과 고립감을 드러내기 위해 무생물과 인공적인 도상들을 선택하고 있다. 도자기 인형, 닫힌 방, 달, 가시꽃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한 것들은 숨가쁘게 흐르는 시류와 수많은 자극에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과 연결을 갈망하는 듯 프레임 밖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은 같은 시공을 공유하는 우리에게 공감의 정서를 전달한다.

다섯, 내재한 위험과 텅 빈 욕망. 작가가 빚어내는 윤곽에서 감지되는 감수성의 지류는 양가적이다. 무엇보다 도자기의 부드러운 광택은 자신의 화려하고 밝은 면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현실과 동일시되는 요즘 모든 일상은 매끄럽게 윤색되며 선택적으로 업로드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매끈함은 속이 비어 있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균열이 가는 도자기의 연약한 속성을 관통한다. 텅 빈 욕망의 조각들은 외부의 시선이나 도처에 내재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그 때문에 늘 불안한 감정 위에서 발현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은 그의 작업에서 구체적인 장면으로 응축되어 나타나며, 표정이 없는 인형은 위협에 놀라거나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를 허무주의적인 맥락으로 읽어 내기에는 여전히 개체 내면에 형용할 수 없는 욕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여전히 남은 질문은 그림에 투사된 많은 도상이 어떻게 이야기를 지속해 갈 것인가에 관한 것일 테다. 작가는 동시대의 사회적 욕망을 투사하는 매개로서 도자기라는 사물과 각색된 풍경을 선택했다. 인간의 감각과 주체성을 대변하는 인형은 그의 회화에서 불현듯 등장했고, 그는 자의적으로 연출한 상황에 개체를 집어넣거나 또 다른 얼굴과 계속해서 마주치도록 하면서 서사의 외연을 확장하고자 한다. 그의 회화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자연물과 인공물, 낮과 밤, 개인과 공동체, 단절과 연대 등 결이 다른 두 힘은 계속해서 서로를 끌어당기며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최지원이 그려 가는 세계는 우리 앞에 당면한 현실을 조금씩 더 선명하게 짚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