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는 본다
양경렬
양경렬의 회화는 매우 강렬한 색채와 붓질, 그리고 여러 개의 장면들이 한 화면 속에 동시에 나타나는 ‘편집’ 기법으로 특징지어진다. ‘표현적(expressive)’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의 회화에는 작가가 보았거나 경험한 수많은 사건들과 이미지, 그리고 개인적 경험들이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장면들에는 연극의 무대 (<보이지 않는 힘>, <A Verbose Speaker>), 유럽의 성당과 거리들(<두 개의 풍경>, <The Spirit of the Age>, <Three Sisters, Dreaming of Moving>, <Tugging Man on the Street>, <Tugging Men in the Light>), 일상적 실내(<A Verbose Speaker>), 전쟁터의 난민들(<Three Sisters, Dreaming of Moving>), 서울의 광장, 어렸을 때 찍은 단체사진(<That Was Just the Beginning>), 시위현장(<On the Street>)과 자연의 풍경(<Tugging Man on the Street>) 등을 망라한다. 기억 혹은 스크랩북을 통해 소환된 이 이미지들은 때로는 병치되거나 상하가 뒤집힌 상태로 화면을 분할한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두 개의 장면이 상하로 반전되어 있을 경우, 그것을 반영이라고 지각한다. 즉 강이나 바다의 수면, 물웅덩이의 표면에 비친 반전된 이미지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양경렬의 그림에서 상하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장면일 뿐 아니라 수면의 고른 면에 의해 분명히 나뉘어 있지도 않다. 게다가 관객은 두 이미지의 내용이나 성격이 명확하게 다르다는 것을 곧 알아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 속에서 반전된 아랫부분의 이미지는 윗부분의 반영이라는 관성적 지각이 지속되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위-아래의 상호연관성에 대해 숙고하도록 유인된다. 이것을 ‘분열적(schizophreniac)’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태들은 상호 지시하고 참조한다. / 세계는 가능한 모든 문장들로 이루어진다. / 모든 것은 모든 것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 등등.
양경렬은 회화의 본질적 특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회화 안에서의 모든 것들은 회화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회화는 장치이다. 회화를 통해 모든 사건, 이미지, 기억들은 색채, 붓질, 물감의 발림으로 환원된다. 회화의 물성은 관객이 스스로의 물적 존재를 투영하는 매개체이다. 관객은 캔버스의 표면에 발린 물감들의 상태와 그것이 전체적으로 나타내는 사태를 동시에 바라봄으로써 두 가지의 다른 인식작용 사이를 오간다.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사건들은 회화 안에서 그것을 표시하는 회화의 물적 양태들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과 감상의 계기들로 변환된다. 디테일과 맥락: 이 두 가지 양립할 수 없는 인식의 영역들 사이를 왕복하게 하는 것이다.
양경렬의 소품 유화들 (<조각상이 있는 풍경>, <길을 잃다.>, <풍경을 즐기다>, <위로를 즐기다.>)은 이러한 양경렬의 회화적 사유를 잘 드러내준다. 이 그림들은 자유롭고 임의적인 붓질들로 인해 매우 빠르게 그려져 있지만 그 안에는 인물들이 마치 작은 물감 덩어리처럼 그려져 있어, 그림의 제목이 이 그림 속의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작게 보이는 나체의 커플들이 벌이는 에로틱한 행각을 발견하는 것은 곧 이 풍경 전체의 분위기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된다. 회화의 물성과 주제의 맥락, 이 두 가지 영역은 병치, 반전, 은폐, 합성 등의 과정을 통해 분열적 세계를 동일화의 현란한 과정으로 끌어들이는 주된 자원인 것이다. 화가는 ‘보고, 또 보고, 여전히 보는’ 과정을 통해 변천하는 세계를 회화적 장치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획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바라보는 주체와 그 주체가 바라보는 대상과의 떨림에 관한 이야기다. 바라본다. 이는 일종의 에너지를 전달하는 행위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에너지는 파장의 형태로 존재한다. 쉽게 말해, 에너지는 떨림으로 존재하고 그 떨리는 모든 에너지들은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의 모든 물질들을 보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 역시 우리의 시선, 즉 관찰자의 에너지를 통해서 스스로를 정의하고 증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은 보는 사람에 의해 단순화되면서 스스로의 존재 양식들을 찾게 된다는 건데, 이는 보는 사람, 보여지는 대상 둘 사이에서 진행되는 에너지의 교차 운동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존재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필요 조건인 셈이다. 양경렬은 이와 같이 성질이 다른 두 개 이상의 개체 혹은 물질들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다. 바라보기, 기억하기, 생각하기 등등 작가의 그리는 행위들 전반에서는 이러한 에너지의 교차 운동과 작가 자신의 끊임없는 감성의 흐름들이 배어 나온다.
임대식 (아터테인 대표), <문득, 나에게 나의 안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