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자리
금민정
금민정은 영상작업을 하는 미디어 아티스트이지만 입체적이고 건축적인 공간과 상호 조응하는 설치작업의 성격 또한 강하게 드러낸다. 특히 오랜 역사의 흔적이 묻어 있는 건물의 공간이나 구조를 주의 깊게 재현하는 그의 작업방식은, 종종 사진에 가까울 정도로 정적인 ‘원 프레임(one frame)’ 영상을 수반한다. 관객들은 작품 속에 내장되어 있는 영상 이미지와 그것을 둘러싼 나무 혹은 철제 프레임의 구조를 독립적인 전체로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프레임 구조로 인해 그의 작품은 종종 문, 창문과 같은 틈이나 열린 공간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바로 이러한 착시 혹은 ‘들여다봄’의 효과는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제목인 <바람의 자리>는 금민정의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미세한 화면의 움직임을 수식한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화면의 전면을 스틸 이미지로 고정시킨 뒤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나 유리창에 비친 하늘의 구름, 혹은 천천히 흔들리는 대나무 잎 등 원경의 일부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 부분들은 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느리거나 간간히 움직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것이 영상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작품들 속에서 ‘바람’은 구름이나 나뭇가지 따위를 서서히 움직이게 할 만큼만 미세하게 불고 있다. 그러므로 바람은 불어서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불어와 이 풍경들 안에서 풀어져 흩어지는 것이다. ‘바람의 자리’라는 표현은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움직임의 속도, 부드러움, 그림자와 빛의 균형 그리고 정적인 장소성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화가의 집> 연작은 처음으로 서양화를 공부하여 한국의 근대 미술을 창시한 고희동의 서울 원서동 가옥을 보여준다. 화가의 고택에서 바라본 다양한 시점의 풍경들은 최초의 근대화가가 일상적으로 느꼈을 생활의 감정들을 그대로 전달한다. 그 외에도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가옥, 북촌 한옥 락고재 등이 작품에 등장하는데, 한옥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관심은 철거된 다른 한옥들에서 나온 서까래, 기둥, 대들보 등을 이용한 작품제작으로 이어졌다. 작가는 이 재료들로 독립된 조각을 제작하거나, 한옥에 머무르며 발견한 돈궤 등을 활용하여 벽에 거는 부조를 만들기도 하였다.
한옥의 장소성은 종종 ‘차경(借景)’에서 그 진가를 드러낸다. 금민정의 작품은 움직이지 않는 구조와 그것에 드리워진 비물질적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 여기서 비물질적 이미지란 한옥 고유의 드리워진 그림자와 그 사이로 빛나는 햇빛, 뚫려있는 문틀 사이로 보이는 원경, 창문 너머의 나뭇가지, 여기저기 보이는 구름들, 그리고 마당과 마루가 이어져 있는 공간으로 흐르는 공기 같은 것들이다. 한옥 고유의 열린 구조가 차경을 만들어 내듯 금민정의 작품들 역시 최소한의 물성과 영상 속의 풍경을 결합시키고 있다. 한국의 전통가옥이 불러일으키는 정지에 가까운 시간의 고유함과 공간의 간결함은, 금민정 작품의 핵심적 요소인 시공간적 정동(情動, affect)에 대한 전형적 장소성으로 읽힌다. 여기 <바람의 자리>에 소개된 작품들은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테제로 이르는 중요한 계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