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 밀리면서 쌓이는 시간의 층
이선영
배상순의 작품은 겉으로는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렇지만 휘저으면 감춰진 것들이 떠오를 듯한 잠재성으로 가득하다. 시간의 축만이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검은 벨벳에 하얀 젯소로 그려지는 형상은 애초에 명확할 수가 없다. 수없는 필획을 거쳐야 겨우 명암 정도가 구별된다. 작가는 이러한 불투명성을 삶과 예술 모두에 적용한다. 거기에는 시간의 저항을 이기고 드러내려는 의지, 반대로 모든 행위를 무위와 죽음으로 덮어버릴 수 있는 어둠의 길항작용이 있다. 밝음과 어둠의 상호관계는 기억과 망각의 상호관계와 연결된다. 작품의 독특한 면은 검은 벨벳이라는 바탕과 관련된다. 작가는 이 재료에 대해 “검은 캔버스 벨벳은 나의 회화에 관한 모든 감각을 엎어 주는 매체”라고 말한다. 벨벳 위에 청먹과 젯소를 바르고 먹선과 목탄으로 선을 그리거나 젯소를 희석한 물감으로 세필한 화면은 수많은 반복에 의한 명암이 명멸하는 장이다. 원래 이 선은 인체 데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작가는 몸을 재현하는 대신에 몸의 리듬을 표현한다. 구조가 아니라 작동을 나타낸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가장 검은 검정은 검은 벨벳이라고 하면서, 이보다 더 깊은 검정은 빛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주 공간에 있다고 말한다. 배상순이 캔버스나 종이 대신에 선택한 주요 매체인 벨벳은 묶인 매듭을 풀거나 잘라내는 극적 행위처럼 빛과의 관계 속에서 이상적인 배경을 이룬다. 작가의 붓질은 이 절대적인 검정에서 기억과 의미를 길어내려는 무수한 해석의 몸짓이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운명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소리 없는 매체인 회화는 침묵으로 말한다.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한 작품은 살아있는 존재뿐 아니라 사라진 존재의 목소리도 깔고 있다. 자연과 역사가 그렇듯이 작품 또한 거듭해서 해석되어야 하는 오래된 텍스트다. 전시 제목으로도 쓰인 바 있고 작품 자체가 ‘시간의 층’이기도 한 작품은 농밀한 밀도를 가지는 추상적 언어를 구사하지만, 작품에 역사와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수학하고 양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는 매듭처럼 꼬인 한일의 역사 관계에 관련되어 심층 연구를 바탕으로 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양국 간에는 실로 수많은 사건이 있으나, 작가가 개별적 사건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 어법으로 서사를 담기는 힘들지만, 작가는 벨벳처럼 중성적이지 않은 표면 위에 무수한 선을 그으면서 서사의 과정에 상응하는 행위의 흔적을 남긴다. 지상적 존재가 유한한 삶을 살며 오갔던 발자국 같은 무명의 흔적이다. 흔적은 길 위에도 길 밖에도 있다. 드로잉 기반의 작품은 드로잉이 쓰기의 연장임을 알려준다. 쓰인 것 위에 또 쓰이기를 반복한 사연은 명쾌하게 읽을 수 없다. 멀리서 본 화면에 파손된 기호 같은 형상이 떠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몸에서 출발한 지글거리는 복잡한 선적 운동은 고요한 초월과는 거리가 있다. 화면을 확대해도 흐트러지지 않는 작품의 밀도는 각자 유일한 삶을 영위하는 듯하지만, 차원을 달리해서 보면 격세 유전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있다. 멀리서 보면 인간의 역사도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의미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은 죽음을 포함한 좀 더 긴 시간의 주기를 생각한다. 모든 것이 끝인 종말론적 세계관이 아닌 순환적 세계관은 나름의 위로를 준다. 배상순에게 추상은 현실의 배제가 아니라 현실을 축약해서 더 많은 현실을 내포하는 대안적 언어이다. 어두운 화면은 묵시록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말이 아닌 또 다른 삶의 토대가 된다. 그리기와 지우기가 큰 차이가 안 나듯이, 사라지는 점과 선은 동시에 생겨나는 점과 선이기도 하다. 소용돌이 같은 흐름 속에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시간을 더욱 가속시킨다. 화면을 덮는 일정한 굴곡 면을 띤 선들은 휘젓는 힘을 연상시킨다. 인간은 맹목적 운명의 지배로부터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삶을 향해 진보해 왔지만, 사회적 규칙이 강하게 작동하는 만큼 무질서의 위험 또한 커지는 것이 문명이다. 존재의 흔적은 때로 기호 같은데,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을 살리려는 작가의 방식은 정지된 기호가 아니라 기호가 되기 이전이나 이후의 상황을 말한다. 그것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자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어두운 바탕에 수없이 그어진 선은 어떤 명확한 형태, 즉 의미로 귀결되기보다는 생성과 소멸의 흔적 그 자체로 남아 있다. 2019년 갤러리 이배에서의 전시 [시간의 층]에서 벨벳에 젯소로 그린 작품은 패널마다 다른 명암의 분포가 반복 속의 차이를 보여준다. 완전한 동그라미가 아닌 조금씩 어긋나며 회귀하는 선은 영겁회귀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무수한 선의 흐름을 통해 작가는 무명의 영토를 표현한다. 이 가는 선은 매듭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잘리고 풀어지는 매듭에는 사람의 얼굴이나 몸 같은 느낌이 있다. 모체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시작하는 삶 자체가 매듭이 생기거나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또는 단호하게 잘라내는 과정의 반복 아니겠는가. 벨벳에 그린 회화 이외에 사진, 도자, 설치 등 다른 매체를 활용한 작품 또한 선적 흐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지속적이다. 배상순의 작품은 타자와의 관계를 역사적 관계로까지 확장한다. 작가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기억을 수집하고 해석했다.
사진과 영상작품으로 만들어진 이 주제는 국가 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태어난, 가령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 사람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배상순의 작업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풀 수 없는 매듭을 사회나 개인의 차원에서 풀 수 있음을 암시한다. 수없이 되풀이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 벨벳 작품을 통해서 작가는 역사 속 무명인의 운명을 본다. ‘생존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아우성처럼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침묵하는 것에 말을 부여하는 힘든 작업이다. 작가에게 매듭은 관계의 은유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체로부터의 분리라는 원초적 트라우마로부터 삶을 시작하지 않는가.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 즉 관계의 연속이다. 여기에는 순리적인 관계도 있고 꼬인 관계도 있다. 매듭은 신화부터 심리학까지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으로 등장해 왔다. 매듭은 풀림을 위한 전조이기도 하다.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관계의 재설정이 필요하므로 타자와의 관계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