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회자들
곽상원
곽상원의 작품들은 회화와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든다. 목탄으로 굵은 윤곽선을 강조한 인물화로부터 매우 강렬한 질감을 쌓아올린 유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매번 다양한 층위와 방법론, 태도들로 각기 상이한 분위기, 정조, 감정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각각의 그림들이 불특정한 서사의 어느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한 형식적 공통점이다. 2013년 작 <파수꾼>은 능선 위의 실루엣을 통해 한 인물이 무엇인가에 대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제목을 통해 그가 ‘파수꾼’이라는 점과 그로 인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능선 위에서 무언가에 대해 총구를 향하고 있는 것이 수비적 행동일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2019년작 <파편의 채널>에서는 이러한 장면의 불연속적 연결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마치 여러 컷으로 이루어진 카툰처럼 굵은 선묘로 그려진 장면들은 각기 무작위적으로 TV나 영화의 장면들을 발췌하여 늘어놓은 것처럼 보일 뿐, 구체적 스토리의 필연적 연결을 확신할 수 없어 ‘열린 서사’로 읽힌다.
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숲 혹은 벌판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 혼자 서있거나 걷고 있는 것이다. <배회자>(2018) 혹은 <서있는 사람>(2020)처럼 장면에 대해 동어반복적인 수식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의 모습은 마치 역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윤곽으로 표시되어 있거나 혹은 뒤를 돌아서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제시된다. 흥미로운 점은 화면의 질감과 빛을 선택하는데 있어 작가가 취하는 매우 독특한 접근방식이다. 예컨대, <배회자>에서 어두운 숲길을 걷는 인물은 흑백의 목탄으로 표현된 ‘동심원’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 여기서 인물은 한적하고 쓸쓸한, 소외된 공간을 걷고 있으면서 동시에 명확하게 상징적인 주체의 위치에 놓여있다. 그는 마치 주인공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베케트적 주인공인 것이다. 반면 <서있는 사람>에서 인물은 무대의 원에서 한발 비켜서 있으며, 모든 윤곽을 잃고 배경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파란 빛 속에 유령처럼 녹아들어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강렬한 마티에르를 지닌 화면을 구축한 뒤 그 위에 파란 물감으로 낙서하듯 배경과 인물을 그려넣었다. 서사는 완전히 다른 회화적 순서와 방법을 결정한다.
최근의 작업에서 인물들은 돌이나 <Stone>(2020) 나뭇가지 넝쿨 <Treefingers>(2021) 사이에 갇혀 실루엣조차 찾아보기 힘든 흔적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징후는 2020년 작 <새겨진 표정>에서부터 예견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늪 속으로 사라진 인물들의 마지막 표정은 땅바닥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 화면 위쪽 중간에 눈을 부릅뜬 것처럼 그려진 인물의 분노한 표정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렵다. 2021년에 그려진 인물화들은 어찌 보면 이 바닥으로부터 되돌아온 유령들처럼 보인다. <My Blue>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백색의 인물은 마치 익사한 신체처럼 가슴으로부터 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다르게 보면 날카로운 식물의 잎이 몸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Youth>의 붉은 실루엣은 목까지 차오른 지평선을 뚫고 길고 구부러진 장대를 든 채 돌아와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청춘에 대한 뜨거운 감정에 불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My Land>의 인물은 (실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투명한 머리를 통해 멀리 떨어진 언덕의 능선이 보일 만큼 유령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루어져 있다. 그의 등은 땀이 배어 있고 바지의 왼쪽 다리 역시 무언가에 젖어 있다. 주저하고 있지만, 그는 푸른 들판을 지나 황량한 자신의 땅으로 향해야 한다. 곽상원의 서사는 지나간 한 시대에 대한 작가의 소회가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제 다시 자신의 땅으로 돌아온 인물은 어디로 갈 것인가?
1983년 생으로 이제 30대 후반에 접어든 작가에게 있어 한국사회에서 그가 살아온 청춘의 시절은 드라마틱한 경제적 부침과 계층적 양극화, 그리고 이념적, 사회적 갈등을 숱하게 강요해온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명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위험한 함정이나 늪지를 걷고 있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2014년 작 <만월을 외치다>나 2019년 작 드로잉 <파편들로부터>에서는 원형의 늪 혹은 연못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후자에서는 다른 한 인물이 늪에 빠진 인물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데, 손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그가 실제로 희생자를 구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른 연작 속에서 이 장면을 목도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나무 뒤에 숨어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2019년 작 <Contact>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인물은 아마도 재난 이후의 장면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죽은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 명은 살아있지만 시선을 잃어버렸다. 이 둘은 같은 사람일수도, 혹은 다른 사람들일수도 있지만, 명확한 것은 이들 모두 동그라미 안의 함정에 사로잡혀 있거나 숲의 거친 나뭇가지들 틈에 갇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곽상원이 그려내는 대상은 치밀한 관찰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망막의 신경에 스쳐 지나간 대상처럼 보인다. 특정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정도의 흐릿한 기억을 확인한다. 따라서 곽상원의 작업은 ‘배회’라는 행위를 증거하고 있다. 작가가 현장을 찾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무슨 이유로 그곳을 찾았는지 어떤 ‘목적’은 배제된다. 따라서 곽상원의 캔버스는 ‘황량함’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어떤것도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 사랑, 감정, 지위, 사람과의 관계도 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작가의 말) 곽상원의 행위 중 캔버스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 유일한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대상화하는 것에서 작가는 불안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려 한다.”
– 황석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