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원

배회자들

곽상원

곽상원의 작품들은 회화와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든다. 목탄으로 굵은 윤곽선을 강조한 인물화로부터 매우 강렬한 질감을 쌓아올린 유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매번 다양한 층위와 방법론, 태도들로 각기 상이한 분위기, 정조, 감정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각각의 그림들이 불특정한 서사의 어느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는 듯한 형식적 공통점이다. 2013년 작 <파수꾼>은 능선 위의 실루엣을 통해 한 인물이 무엇인가에 대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제목을 통해 그가 ‘파수꾼’이라는 점과 그로 인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능선 위에서 무언가에 대해 총구를 향하고 있는 것이 수비적 행동일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2019년작 <파편의 채널>에서는 이러한 장면의 불연속적 연결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마치 여러 컷으로 이루어진 카툰처럼 굵은 선묘로 그려진 장면들은 각기 무작위적으로 TV나 영화의 장면들을 발췌하여 늘어놓은 것처럼 보일 뿐, 구체적 스토리의 필연적 연결을 확신할 수 없어 ‘열린 서사’로 읽힌다.

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숲 혹은 벌판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 혼자 서있거나 걷고 있는 것이다. <배회자>(2018) 혹은 <서있는 사람>(2020)처럼 장면에 대해 동어반복적인 수식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물의 모습은 마치 역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윤곽으로 표시되어 있거나 혹은 뒤를 돌아서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제시된다. 흥미로운 점은 화면의 질감과 빛을 선택하는데 있어 작가가 취하는 매우 독특한 접근방식이다. 예컨대, <배회자>에서 어두운 숲길을 걷는 인물은 흑백의 목탄으로 표현된 ‘동심원’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 여기서 인물은 한적하고 쓸쓸한, 소외된 공간을 걷고 있으면서 동시에 명확하게 상징적인 주체의 위치에 놓여있다. 그는 마치 주인공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베케트적 주인공인 것이다. 반면 <서있는 사람>에서 인물은 무대의 원에서 한발 비켜서 있으며, 모든 윤곽을 잃고 배경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파란 빛 속에 유령처럼 녹아들어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강렬한 마티에르를 지닌 화면을 구축한 뒤 그 위에 파란 물감으로 낙서하듯 배경과 인물을 그려넣었다. 서사는 완전히 다른 회화적 순서와 방법을 결정한다.

최근의 작업에서 인물들은 돌이나 <Stone>(2020) 나뭇가지 넝쿨 <Treefingers>(2021) 사이에 갇혀 실루엣조차 찾아보기 힘든 흔적이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징후는 2020년 작 <새겨진 표정>에서부터 예견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늪 속으로 사라진 인물들의 마지막 표정은 땅바닥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뭉개져 있다. 화면 위쪽 중간에 눈을 부릅뜬 것처럼 그려진 인물의 분노한 표정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렵다. 2021년에 그려진 인물화들은 어찌 보면 이 바닥으로부터 되돌아온 유령들처럼 보인다. <My Blue>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백색의 인물은 마치 익사한 신체처럼 가슴으로부터 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다르게 보면 날카로운 식물의 잎이 몸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Youth>의 붉은 실루엣은 목까지 차오른 지평선을 뚫고 길고 구부러진 장대를 든 채 돌아와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청춘에 대한 뜨거운 감정에 불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My Land>의 인물은 (실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투명한 머리를 통해 멀리 떨어진 언덕의 능선이 보일 만큼 유령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루어져 있다. 그의 등은 땀이 배어 있고 바지의 왼쪽 다리 역시 무언가에 젖어 있다. 주저하고 있지만, 그는 푸른 들판을 지나 황량한 자신의 땅으로 향해야 한다. 곽상원의 서사는 지나간 한 시대에 대한 작가의 소회가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제 다시 자신의 땅으로 돌아온 인물은 어디로 갈 것인가?

1983년 생으로 이제 30대 후반에 접어든 작가에게 있어 한국사회에서 그가 살아온 청춘의 시절은 드라마틱한 경제적 부침과 계층적 양극화, 그리고 이념적, 사회적 갈등을 숱하게 강요해온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명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위험한 함정이나 늪지를 걷고 있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2014년 작 <만월을 외치다>나 2019년 작 드로잉 <파편들로부터>에서는 원형의 늪 혹은 연못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후자에서는 다른 한 인물이 늪에 빠진 인물을 향해 팔을 뻗고 있는데, 손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그가 실제로 희생자를 구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른 연작 속에서 이 장면을 목도하고 있는 인물들은 모두 나무 뒤에 숨어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2019년 작 <Contact>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두 인물은 아마도 재난 이후의 장면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죽은 것처럼 보이고, 다른 한 명은 살아있지만 시선을 잃어버렸다. 이 둘은 같은 사람일수도, 혹은 다른 사람들일수도 있지만, 명확한 것은 이들 모두 동그라미 안의 함정에 사로잡혀 있거나 숲의 거친 나뭇가지들 틈에 갇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곽상원이 그려내는 대상은 치밀한 관찰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 아닌 망막의 신경에 스쳐 지나간 대상처럼 보인다. 특정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은 거기에 있었다 정도의 흐릿한 기억을 확인한다. 따라서 곽상원의 작업은 ‘배회’라는 행위를 증거하고 있다. 작가가 현장을 찾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만 무슨 이유로 그곳을 찾았는지 어떤 ‘목적’은 배제된다. 따라서 곽상원의 캔버스는 ‘황량함’으로 가득 차있다. “나는 어떤것도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 사랑, 감정, 지위, 사람과의 관계도 어쩌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작가의 말) 곽상원의 행위 중 캔버스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 유일한 목적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을 대상화하는 것에서 작가는 불안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려 한다.”

– 황석권

곽상원
b.1983
개인전
2020 <저온곡선>, 디스위켄드룸, 서울
2019 <파편들로부터>, 아트스페이스 휴, 파주
<Youth>,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7 <배회자>, 갤러리 조선, 서울
2014 <헤엄치는 새>, 갤러리 이마주, 서울
2013 <시선의 축적/사냥의 적>, 갤러리 175,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Far in My Mirror>, 디스위켄드룸, 서울
2020 <yes, This is our map>, 갤러리밈, 서울
<Zoom In IAa>, 예술공간 이아, 제주
2019 <illusion-elusion>,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성남
<과정 추적자>, 우민아트센터, 청주
<발신자 조회>,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8 <낯, 가리다>, 성남아트센터 큐브미술관, 성남
<밤을 잊은 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야간산행>, 아트스페이스 휴, 파주
<뉴 드로잉 프로젝트>, 장욱진 미술관, 양주
2017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금호 미술관, 서울
<절망적 비관적 낙천적>, 세움아트스페이스, 서울
<인사이드 아웃>, 프로젝트 스페이스 우민, 우민 아트센터, 청주
<사람들은 이런걸 소설이라고 한단다>, 남산집, 써드플레이스-정다방 프로젝트, 서울
2016 <육각의 방>, 금호미술관, 서울
<제3의 시선>, 일현미술관, 양양
<오뉴월메이페스트>, 스페이스오뉴월, 서울
2015 <미쟝센>, 공간 지금 여기, 서울
<잠재적 표상>, 신미술관, 청주
<망각에 저항하기>, 안산예술의 전당, 안산
2014 <예술 공간 자유 기록전>, 예술 공간 자유, 고양
<Young Creatives>, 성남 아트센터 큐브 미술관, 성남
<자립 혹은 침투>, 동덕 갤러리, 서울
<오늘의 살롱>, 커먼 센터, 서울
<낙서>, 언오피셜 프리뷰 갤러리, 서울
<서늘한 모서리>,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교사갤러리, 서울
2011 <화살표>, 갤러리M, 대구
<심안의 공식>, 갤러리175, 서울
2010 <동방의 요괴 선정 작가전>, 두산아트센터, 서울
<언어 놀이>, 성곡미술관, 서울
수상
2017 예술창작지원, 서울문화재단
2015 ARKO WORKSHOP,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4 예술창작지원, 서울문화재단
신진작가 선정, 신미술관
2013 신진예술가 양성프로젝트 라이징 스쿨 레지던시, 일현미술관
2010 동방의 요괴 선정, 아트인컬쳐
레지던시
2018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15-2017 금호창작스튜디오, 서울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환영(幻影)의 조건(Conditions of Illusion) – 곽상원의 그림에 관하여
조새미(미술비평)

곽상원의 그림이 지각되는 방법은 아날로그 필름 영화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다만 아날로그 필름 영화는 고정된 광원과 회전운동에서 비롯된 비물질적 이미지의 집적으로 실현되고,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진다. 반면 곽상원의 그림에는 광원이 없다. 그림 위에 그림을 겹쳐 그리는 작가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은 화면 안에 물리적으로 축적된다. 곽상원의 그림은 표면의 정보량을 삭감하여 투사의 메커니즘을 자극한다. 관객에게 그림 속 수수께끼 풀기를 독려하며, 특별한 인내를 요구한다. 작가는 그림 아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그림들을 숨겼다. 화폭 속의 암호문, 관객은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이 주고받는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작가의 그림은 표면적으로 제공되는 시·지각적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경우 공감각적 시간의 집적으로 귀결된다.

<Contact>(2019)에서 관객의 눈에 보이는 인물은 두 명이다. 그들은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의 두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고, 긴박한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의 정치가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사찰의 법당 안에 그려진 탱화 속의 부처나 보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만약 X선으로 이 그림을 촬영한다면 열 명도 넘는 인물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아래 그림, 시간과 사건이 쌓여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이 그림에서 다른 열 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시각적으로 지각되지 못할 그림을 의도적으로 그린 것이다.

곽상원의 <파편의 기록> 연작과 같은 2017년 이전 작품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 정치인, 아버지와 같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였다. 이는 점차 인간의 무의식이나 성적 욕망·불안·절망·죽음과 같은 인간의 심리상태 기저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작가의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관한 관심은 환영(幻影)의 투사(projection of Illusion)라는 방법론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각적 분류 행위와 관련하여 논의해 볼 때 의미 있는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다.1)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는 종이에 그려진 잉크 반점이 모호한 자극으로 작용하여,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성격의 여러 측면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검사법이다. 자극에 따라 일어나는 지각반응을 분석하여 개인의 인격 성향을 추론하고, 불안, 긴장, 갈등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2) 소위 환영의 투사라는 방법론을 작품 제작의 방법론으로 수용했을 때, 작품은 작가의 경험뿐 아니라 관객의 능력과도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묘사는 관객의 묘사로 변용되는데, 관객은 관련 기억을 다른 기억과 새롭게 결합시켜 변주할 수 있다. 이렇듯 곽상원의 ‘그림’의 성공 여부는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기억을 투사할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환영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관객의 상상력이 간여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 놓았고, 이를 통해 관객은 작가가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3)

곽상원은 관객이 판독과 해석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그림 속에 단서를 남겼다. <Blue Water>(2019)에서는 가느다란 다섯 개의 선으로, <Engraved Face>(2020)에서는 화면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는 마른 붓자국으로, <Stander>(2019-2020)에서는 공기처럼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선들로, 그리고 <Treefingers>(2021)에서는 생명체의 혈관처럼 표현했다. 이 일련의 푸른색은 ‘없음’과 같은, 또는 대기(大氣)와 같은 상태의 메타포이다. 이 단서의 역할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전형적으로 적용되었던 스푸마토(sfumato)4) 기법이 발현해 내는 이미지의 효력과 닮았다. 화면을 지배하는 비어 있는 상태에 관한 암시는 화면 안의 인물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화면 안의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양면 그림 <Hope>(2021)와 <Air>(2021)는 천정에 설치되어 늘어뜨려져 있다. <Hope>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형상이 보인다. 시간차를 두고 다시 앞쪽으로 와 보니 앞면에는 덤불을 헤치고 나와 무엇인가 붙잡으려는 양손이 보인다. <Air>의 뒷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다. 얼굴을 맞댄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만물이 소생하듯 생기가 넘치는 화면의 중앙에 성별을 알 수 없는 두 존재가 있다. 하지만 캔버스의 앞면으로 돌아와 보니 뒷면에서 넘쳐나던 감정적 풍요로움이 온데간데 없다. 모두 떠나버린 장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혼령과 같은 실루엣만이 남아 있다. 뒷면 그림은 과거의 그림이며, 앞면 그림은 현재에 더 가깝다. 뒷면 그림은 프롤로그(prologue), 앞면 그림은 에필로그(epilogue)에 비유할 수 있다.

곽상원의 작업의 주제는 현실의 인물, 정치적 사건들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환영의 집적, 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인문학적인 관심으로 전환되어 왔다. 그의 그림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자신들의 피부 아래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느냐고. 그들도 삶을 영위하고 사랑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의 환영으로 그들을 구원해 줄 의향이 있느냐고. 울렁이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 묻혀 있던 그림들은 관객의 환영이라는 통로를 통해 현실로 귀환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 사이를 유영하는 이들은 ‘그림’의 존재 이유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자신들을 통해서만 예술이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속삭인다. 물질, 공간, 시간과 같은 물리적 요소가 그림 안에서 여전히 뿌리 깊이 존재하는 조건하에서도 환영이 없다면 그림도 없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명(耳鳴)을 일으킨다.

1) E. H. 곰브리치, 차미례 옮김, 『예술과 환영,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 열화당, 2008 [1960], p. 185.
2) http://amc.seoul.kr/asan/healthinfo/management/managementDetail.do?managementId=528
3)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p. 217.
4) ‘연기와 같이 (사라지다)’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경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해 대기 효과를 생성하는 기술적 방법.

환영(幻影)의 조건(Conditions of Illusion) – 곽상원의 그림에 관하여
조새미(미술비평)

곽상원의 그림이 지각되는 방법은 아날로그 필름 영화의 그것과 닮아 있다. 다만 아날로그 필름 영화는 고정된 광원과 회전운동에서 비롯된 비물질적 이미지의 집적으로 실현되고,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진다. 반면 곽상원의 그림에는 광원이 없다. 그림 위에 그림을 겹쳐 그리는 작가의 노동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노동은 화면 안에 물리적으로 축적된다. 곽상원의 그림은 표면의 정보량을 삭감하여 투사의 메커니즘을 자극한다. 관객에게 그림 속 수수께끼 풀기를 독려하며, 특별한 인내를 요구한다. 작가는 그림 아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다른 그림들을 숨겼다. 화폭 속의 암호문, 관객은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이 주고받는 암호를 해독해야 한다. 작가의 그림은 표면적으로 제공되는 시·지각적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경우 공감각적 시간의 집적으로 귀결된다.

<Contact>(2019)에서 관객의 눈에 보이는 인물은 두 명이다. 그들은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의 두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고, 긴박한 문제로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의 정치가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사찰의 법당 안에 그려진 탱화 속의 부처나 보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만약 X선으로 이 그림을 촬영한다면 열 명도 넘는 인물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아래 그림, 시간과 사건이 쌓여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이 그림에서 다른 열 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시각적으로 지각되지 못할 그림을 의도적으로 그린 것이다.

곽상원의 <파편의 기록> 연작과 같은 2017년 이전 작품들은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 정치인, 아버지와 같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한 결과였다. 이는 점차 인간의 무의식이나 성적 욕망·불안·절망·죽음과 같은 인간의 심리상태 기저에 흐르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작가의 인간의 보편적 심리에 관한 관심은 환영(幻影)의 투사(projection of Illusion)라는 방법론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지각적 분류 행위와 관련하여 논의해 볼 때 의미 있는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다.1) 로르샤흐 검사(Rorschach test)는 종이에 그려진 잉크 반점이 모호한 자극으로 작용하여,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는 성격의 여러 측면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검사법이다. 자극에 따라 일어나는 지각반응을 분석하여 개인의 인격 성향을 추론하고, 불안, 긴장, 갈등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2) 소위 환영의 투사라는 방법론을 작품 제작의 방법론으로 수용했을 때, 작품은 작가의 경험뿐 아니라 관객의 능력과도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묘사는 관객의 묘사로 변용되는데, 관객은 관련 기억을 다른 기억과 새롭게 결합시켜 변주할 수 있다. 이렇듯 곽상원의 ‘그림’의 성공 여부는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기억을 투사할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환영을 볼 준비가 되어 있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관객의 상상력이 간여할 여지를 충분히 남겨 놓았고, 이를 통해 관객은 작가가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3)

곽상원은 관객이 판독과 해석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그림 속에 단서를 남겼다. <Blue Water>(2019)에서는 가느다란 다섯 개의 선으로, <Engraved Face>(2020)에서는 화면의 표면을 스쳐 지나가는 마른 붓자국으로, <Stander>(2019-2020)에서는 공기처럼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선들로, 그리고 <Treefingers>(2021)에서는 생명체의 혈관처럼 표현했다. 이 일련의 푸른색은 ‘없음’과 같은, 또는 대기(大氣)와 같은 상태의 메타포이다. 이 단서의 역할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전형적으로 적용되었던 스푸마토(sfumato)4) 기법이 발현해 내는 이미지의 효력과 닮았다. 화면을 지배하는 비어 있는 상태에 관한 암시는 화면 안의 인물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화면 안의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도록 방해한다.

양면 그림 <Hope>(2021)와 <Air>(2021)는 천정에 설치되어 늘어뜨려져 있다. <Hope>의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사람의 머리처럼 보이는 형상이 보인다. 시간차를 두고 다시 앞쪽으로 와 보니 앞면에는 덤불을 헤치고 나와 무엇인가 붙잡으려는 양손이 보인다. <Air>의 뒷면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웅크리고 있는 두 사람을 그린 그림이 있다. 얼굴을 맞댄 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만물이 소생하듯 생기가 넘치는 화면의 중앙에 성별을 알 수 없는 두 존재가 있다. 하지만 캔버스의 앞면으로 돌아와 보니 뒷면에서 넘쳐나던 감정적 풍요로움이 온데간데 없다. 모두 떠나버린 장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배회하는 혼령과 같은 실루엣만이 남아 있다. 뒷면 그림은 과거의 그림이며, 앞면 그림은 현재에 더 가깝다. 뒷면 그림은 프롤로그(prologue), 앞면 그림은 에필로그(epilogue)에 비유할 수 있다.

곽상원의 작업의 주제는 현실의 인물, 정치적 사건들에 관한 관심에서 시작하여 환영의 집적, 심리학적 분석이라는 인문학적인 관심으로 전환되어 왔다. 그의 그림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자신들의 피부 아래 발굴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느냐고. 그들도 삶을 영위하고 사랑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의 환영으로 그들을 구원해 줄 의향이 있느냐고. 울렁이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 묻혀 있던 그림들은 관객의 환영이라는 통로를 통해 현실로 귀환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보이는 그림과 보이지 않는 그림 사이를 유영하는 이들은 ‘그림’의 존재 이유는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자신들을 통해서만 예술이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속삭인다. 물질, 공간, 시간과 같은 물리적 요소가 그림 안에서 여전히 뿌리 깊이 존재하는 조건하에서도 환영이 없다면 그림도 없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명(耳鳴)을 일으킨다.

1) E. H. 곰브리치, 차미례 옮김, 『예술과 환영, 회화적 재현의 심리학적 연구』, 열화당, 2008 [1960], p. 185.
2) http://amc.seoul.kr/asan/healthinfo/management/managementDetail.do?managementId=528
3)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p. 217.
4) ‘연기와 같이 (사라지다)’라는 뜻으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경계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부드럽게 처리해 대기 효과를 생성하는 기술적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