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훈

Some Love It, Others Hate It

안상훈

안상훈의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들 혹은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혼재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의 캔버스 위에는 마르지 않은 상태의 색채들이 빠른 붓질에 의해 뒤섞이거나 발려 나가는 과정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때로는 색면들이, 때로는 윤곽선이, 때로는 물감의 발려진 물성이 두드러지는 그의 화면구성은 즉흥적이고 예민하며 격렬하면서도, 적정한 선에서 손을 떼는 전형적인 회화적 회화(painterly painting)의 세련됨을 보여준다. 회화적 회화는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의 전통을 살리면서 동시대 회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회화의 영역이다.

독특하게도 2015년부터 안상훈은 먼저 자발적 회화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 매우 임의적인 방식으로 제목을 지어왔다. 예컨대, 작품 촬영 사진의 일련번호를 구글에 검색한 후 거기서 도출된 단어나 문장들 가운데 작가가 고른 것을 작품의 제목으로 삼는 방식 등이 그것이다. 2020년에 이르러서는 제목과 이미지 사이의 연약한 관계를 드러내는, 우연적이면서도 좀 더 상호 유추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목을 짓고 있다.

이러한 명명 방식은 회화의 추상성을 특정한 사건이나 서사와 연결 지음으로써 그것에 구체적 맥락을 부여하는 작용을 한다. 많은 추상표현주의 회화들이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 개념들과 연관되었던 것에 비하면, <특별한 날엔 이야기가 필요하다> 혹은 <More Was Not Necessary> 등의 제목은 이미 강렬하게 회화적 물성을 중심으로 구축된 화면에 마치 일기나 소설의 한 챕터를 떠올리는 서사적 힌트를 던져준다.

물론 제목이 이끌어내는 서사적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는 화면을 이루고 있는 비언어적이면서 함축적인 회화적 사건들에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화가가 한 일은, 캔버스 위에 다양한 사건들을 일으키고 그것들을 조율하거나 충돌로 이끌어 화면을 결정적인 사건의 현장 혹은 그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사건들은 매번 다르게 일어나고 화면 속에 생겨난 대상들의 양상 역시 매번 상이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들에 대한 수식이나 한정 역시 수없이 변주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회화는 시공간 속에서 의식이 어떻게 물질과 상호작용하는지를 가장 시각적인 재료들로 나타낸다. 안상훈의 회화는 예외적인 색채들과 그것들의 물성이 캔버스 위에 생생하게 발려지는 회화적 사건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안상훈에게 있어 단어나 문장의 기재(inscription)가 어떤 회화적 의식을 부각시키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이번 전시 제목을 <Some Love It, Others Hate It>으로 결정했다. 이 문장은 몇몇 작품에서 회화적 요소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유보적인 서술은 작가의 감정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임의적으로 도출된 것일 수도 있다. 제목이 함축적인 것처럼 그것과 작품의 관계도 함축적이다. 마르셀 뒤샹은 제목을 ‘비가시적 색채’(Invisible Color)라고 불렀다. 안상훈의 회화에서도 제목은 다른 여러 회화적 물성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마스터로서 다루어 내는 이러한 많은 재료들이 모여 그의 회화에 탁월한 분위기와 독자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예술감독 유진상

‘100% 회화’란 특정한 이념이나 양식적 성격 그리고 미술사조의 계열과 단절된 상태의 회화를 가리킨다. 말 그대로 색과 형태의 혼합, 물질과 색채 그리고 어떤 상징이나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 상태에서 비롯된 선과 얼룩, 형태, 붓질의 강도와 뉘앙스가 안상훈의 회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정현 (미술비평가, 인하대학교 교수), <어긋나기, 100% 회화에 다가가는 방법>

안상훈
b. 1975
개인전
2020 <특별한 날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혼자 기다리지 않기 위해, 잊혀진 채로 남기 위해>, 갤러리조선, 서울
2018 <올해의 입주작가전: 모두와 눈 맞추어 축하인사를 건네고>,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친절한 농담>, 쌀롱 아터테인, 서울
<내 신발이 조금 더 컬러풀 해>, 갤러리 조선, 서울
2017 <굿: 페인팅>, 인천아트플랫폼 창고갤러리, 인천
2016 <아스팔트 위에는 빵이 자라지 않는다>, Kreis Museum, 오스터부르크
<캡슐 컬렉션>, 아트스페이스 루,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퍼블릭아트 뉴히어로>, 청주시립 대청호미술관, 청주
<꽃>, 뮤지엄헤드, 서울
2020 <부드러운 벽, 건조한 과일>, n/a 갤러리, 서울
2019 <어긋나는 생장점>, 문화비축기지, 서울
<유령 걸음>, 경기창작센터, 안산
<수림미술상>, 수림아트센터, 서울
2018 <veni vidi vici>, Plan B 프로젝트스페이스, 서울
<이미지 속의 이미지>, 아트스페이스 휴, 파주
2015 <5. 템펠호퍼 미술전>, Galerie im Tempelhof Museum, 베를린
2014 <푀더프라이스>, Kunsthalle Münster, 뮌스터
<이상한 집>, Sparkasse Bank, 겔젠키르헨
<쿤스트페어라인 virtuell-visuell e.v.>, 도르스텐
수상
2019 수림미술상, 우수상, 수림문화재단
2018 뉴히어로, 퍼블릭아트
2017 올해의 입주작가상,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2020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고양
2019 경기창작센터, 안산
2017-2018 인천아트플랫폼, 인천
2015 Residency Kunsthof Dahrenstedt, 독일

웅얼거리는 흔적들
정현

들어가기
회화는 무엇을 구하는가? 과연 회화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작업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회화는 미술의 근본을 품은 채로 근대 이후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효용성에 대한 억측과 요구 사이를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 새로운 미디어가 나타날 때마다 회화의 죽음은 유행병처럼 미술 세계를 혼돈에 빠트렸지만,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부활하였다. 그렇게 21세기를 앞두고 몇 번의 고비를 거치면서 생존한 회화는 예전처럼 평면, 지지대, 프레임이라는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일궈내고 있다. 회화적 실험은 전방위적으로 전개된다. 평면과 지지대를 버리고 실제 공간을 회화의 화면으로 삼아 감상의 대상에서 경험의 장으로 확장하고, 안료 대신 체액을 이용함으로써 신체와 회화의 물리적 관계가 형성되고,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꾼 것처럼 회화가 영토를 표현하는 매체에서 지형도를 그리는 플랫폼이 되었다. 이처럼 동시대 회화는 구상과 추상, 미학과 현실 사이의 구분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이러한 경향을 ‘새로운 추상성’의 시대로 부른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것’의 귀환이 아니라 새로운 프레임으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 추상 미학이 추구한 내면성, 정신성의 강령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추상회화는 가상, 실재, 인종, 젠더, 문화, 사물, 국가, 사조, 이념을 넘어선 포용의 세계를 지향하며, 개인이 접속한 다양하고 다원적인 세계 간의 감각적 경험을 어떻게 회화라는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매혹적인 표현 방식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묻는다. 안상훈은 이러한 동시대 미술의 흐름 안에서 오히려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나 모더니즘 추상미술을 재방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속도와 스타일의 경쟁에서 벗어나 회화라는 ‘행위’의 가치와 의미가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를 근시안적인 방법으로 더듬거리며 어디론가 나아가는 중이다. 그는 추상이란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회화의 목적은 아니다. 그는 되레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렇다면 이제 회화와 회화를 지지하는 주변의 요소를 통하여 어떻게 회화가 구성되는지를 살펴보자.

 

그리기/지우기
“유학 시절에 정원사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이 그림 속에는 당시의 기억이 어렴풋이 담겨 있습니다. 굳이 기억을 재현하지는 않았어요. 제 그림은 매일의 기록, 일기와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일기는 아닙니다.”1) 안상훈은 자신의 회화가 하나의 상징으로 이어지는 걸 주의한다. 회화가 의미나 해석으로 이해되기보다 오로지 회화로 보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바람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연의 힘을 빌린다고 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전 작업의 표제를 전제로 작업을 진행하거나, 완성된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한 뒤 사진 파일의 일련번호를 구글링하여 검색된 정보 중에서 작품 표제를 선택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우연을 개입시켜 익숙함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예술작품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연결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한 점의 그림(작품, Ergon)은 이미지와 물질(캔버스, 안료, 지지체), 담론적 요소(액자, 서명, 제목, 해설, 제작연도, 크기 등)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림 외부(작품의 주변, Parergon)에 위치한 담론적 요소가 실제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즉,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의 상호작용이 작품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 곧 작품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외부와의 관계까지도 작품의 비가시적인 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왜 내부와 외부의 상호성을 주목했을까?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닫혀 있다고 보았다. 즉, 세계의 바깥은 없다. 예외적으로 예술만이 내외부 사이의 틈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나타날까? 작품의 의미는 그림이라는 사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는 사건의 주변부, 즉 프레임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한편 안상훈은 그림과 언어가 연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제목이 작품을 설명하거나 그것의 의미를 제시한다는 오해가 만들어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림과 표제를 어긋나게 하는 작업 방식은 회화가 어떤 주제나 줄거리로 정리되는 것을 제한한다. 이처럼 의도된 어긋남은 우연과 필연, 선택과 포기의 과정을 거쳐 의미를 탈각하거나 반대로 뜻밖의 의미를 유발할 것이다. 따라서 회화의 의미는 임의적으로 무한 생산될 수 있다.

안상훈의 회화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대부분 색과 형태, 질감과 붓질(brushstroke)로 이뤄진다. 여기서 그리기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는 행위라기보다 기억을 꺼내어 다듬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그리기는 반대로 지우기와 겹친다. 마치 무형의 유물을 되찾기 위해 허공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 행위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닌 ‘느낌을 감각하는 과정’이다. 안상훈이 화면 위에 남긴 흔적은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가 어떤 기억을 되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덧없고 무모한 반복의 더듬기로 남겨진 얼룩과 붓질의 흔적이 곧 회화적 사건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태들이 연쇄되고 포개어지고 색이 겹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자신이 몰랐던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마주치기도 하고, 전혀 본 적 없는 형태들이 나타나는 장면을 탐닉할 때도 있다.”2) 그것은 마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지중해의 햇빛과 이글거리는 꽃을 연상시키는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회화를 두고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석한 것과도 어렴풋이 이어진다. 안상훈의 그리기/지우기의 겹침은 격정의 드러냄이 아닌 머뭇머뭇 복합적인 감정으로 다가가는 과정이다. 이미 텅 빈 주제를 다시 꺼내는 행위는 순환 철도를 무한 회귀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이 밀쳐낸 기억 속에서 불특정한 구간 사이를 왕복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익숙함을 반복하면서 멀어지는 것과 같다. 작가는 자신의 삶 내외부를 오가면서 무언가를 명시하기보다 어떤 망설임, 웅얼거림을 꺼내 온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이러한 웅얼거림을 두고 “작가의 글이 메아리”가 되는 것이라 비유한다. 메아리란 침묵의 결과이다. 블랑쇼는 “그 웅얼거림 위에 언어는 열리고 그리하여 언어는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라는 것이 되고, 말하는 깊이가 되고, 공허라는 어둑한 충만이 된다”3)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리기와 쓰기, 보여주기와 말하기는 정확한 의미를 제시하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블랑쇼는 이러한 관계의 전형성을 부정한다. 이것이 그리기가 지우기를 동반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누구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불현듯 솟아난 기억 때문에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반가우면서도 되돌아갈 수 없음에 무기력해지는 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조각난 기억을 따라 더 먼 곳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아쉽지만 폐기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예술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기억을 되돌아보도록 도움을 준다.

회화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상훈은 독일에서 농장 건물 외벽을 화면 삼아 일종의 공공적 성격의 회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Brushstroke 3(H, M, N), 오래된 농장 벽 위에 벽화, Kunsthof Dahrenstedt, Germany, 2015). 이 경험은 안상훈에게 임의적이고 즉흥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독일의 야외 작업은 공간과 장소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개념적인 기반으로 진화한다. <GOOD: PAINTING>(2017, 인천아트플랫폼)은 비닐을 이용한 한시적인 설치 회화를 실험한 전시이다. 안상훈은 이 계기를 통하여 그의 예술이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를 명시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회화가 무엇이며, 그것의 효용성이란 상투적인 질문을 넘어서 회화에 덧씌워진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질문한다. 비닐 막을 씌운 전시장 벽면, 그 얇은 막 위에 검은 얼룩처럼 보이는 선과 흔적이 뒤엉켜 있다. 관객은 이 낯선 장면 앞에서 자문하게 된다. 좋은 회화가 무엇인지를. 결론적으로 안상훈에게 회화는 그저 회화일 뿐이다. 회화의 좋고 나쁨은 형식주의 미학 안의 조건에서나 허용될 것이다. 그에게 회화는 정복해야 할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워져야 할 상징이다. 따라서 ‘좋은 회화’란 중의적인 물음이자 회화를 둘러싼 가치판단의 기준이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되묻는다.

회화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곧 화가/작가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을 위한 미술관>(2017)은 엄선된 자신의 작품 125점의 그림 중 작품명만 보고 1점을 선택하여 그 그림을 마주 보고 최대 5분간 감상하게 하는 실험이었다. 스튜디오 내부에는 일시적인 수장고가 제작되었고 85명의 참여자는 작품명 목록에서 보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였다. 과연 참여자들은 어떤 경험을 가졌을까? 누군가는 제목과 그림의 의미를 연결하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림 속에 의미를 작동시키는 단서가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5분을 꼼꼼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시 <매일매일 윈도우 프로젝트>(2018, 인천아트플랫폼)는 윈도 폭이 채 1m가 되지 않은 정체성이 모호한 전시 공간을 활용한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22일간 이 좁은 쇼윈도 안에서 작업을 진행한다. 그것은 회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수행적 퍼포먼스로,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 관광객, 이웃, 예술관계자 등에게 회화는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다소 무거운 질문을 어쩌면 조금 낭만적으로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전시 제목 “from the moment you walk through the door until the moment you leave(당신이 저 문을 통해 들어온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는 영화 아비정전(1990)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 아비(장국영)는 매일 3시 경기장 매표소를 찾아가 그곳에서 일하는 소려진(장만옥) 주변을 배회하길 반복한다. 하루는 소려진에게 다가가 “1분이란 시간 동안 자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란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자유인 아비는 소려진과 결혼을 원치 않았고 소려진은 그 1분을 영원히 기억한다. 쇼윈도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안상훈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영화 속 장국영/장만옥의 모습이 비친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리고 그림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22일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쇼윈도 앞을 지나갔으며 누가 그 내부로 들어왔을까? 이 같은 상상은 또 다른 프레임이 되어 의미를 생성한다. 그림이 생성되는 시간과 그 과정을 바라보는 감상의 시간이 겹쳐지고, 이 같은 상황 안에서 그리기와 지우기, 감상하기와 기억하기, 예술과 현실, 작품과 상품 등 여러 겹의 의미와 해석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온전한 의미와 해석이 아닌 마치 환영 같은 경험이 스치듯 지나간다.

순환하는 회화
안상훈은 종이, 캔버스 위에 주로 그림을 그리지만, 연약한 매체를 사용하는 것도 즐기는 편이다. 그것은 비닐 위에 그리는 회화로 <GOOD: PAINTING>(2017,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처음 선보인 그리기 방식이다. 주로 전시장 내외부의 벽을 사용하거나 가벽을 제작하여 벽 위에 비닐을 씌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면을 완성한다. 비닐 표면은 수성페인트로 보강되어 색과 질료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다. 그는 붓과 래커를 이용하여 이 연약한 표피 위에 몸이 움직이는 궤적과 같은 행위의 흔적을 남긴다. 캔버스 회화가 보존하기 수월한 매체라면 비닐 회화의 내구성은 매우 취약하다. 매체의 특성상 안료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처럼 쉽게 눌러지거나 벗겨지는 성질은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는 회화 방식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듯하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불어왔다>(2019, 수림미술관)는 비닐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할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에서는 비닐뿐만 아니라 대부도와 수림문화재단에서 수거한 현수막을 수성페인트로 초벌 후 그 표면 위에 특유한 흔적의 그리기/지우기를 진행한다. 비닐 회화는 이제 폐기물을 재활용한 일회용 회화로 진화한다. 안상훈은 일회용 회화를 매개로 현실의 부산물과 조우한다. 무엇보다 전시가 끝나면 일회용 회화는 미술의 자리에서 벗겨져 현실로 되돌아간다. 한편 이 일회용 회화는 캔버스 회화의 대구(對句)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버려진 사물이 캔버스의 대체물로 사용되자 순수와 현실, 관념과 실재가 혼재하게 되는데, 이는 추상미술을 향한 과장된 의미 부여와 시장 논리가 결탁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도 어느 정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화적 실험은 목적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목적지가 정해졌다면 실험을 지속할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 <빈 지속하는 언어>(샘표스페이스, 2020)에서는 2018년부터 3년간 사용한 일회용 회화의 산물4)을 한데 모은 회화-콜라주-설치 “2018-2020”(2020)을 선보인다. 그간 사용된 합판, 비닐, 아크릴판 등을 빼곡하게 모아놓은 모습은 마치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aldaccini)의 압축 조각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회화하기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의 삶을 자신답게 사는 방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기, 쓰기, 지우기와 같은 행위는 먹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닮았다. 최근 들어서는 팔레트가 그의 관심을 받고 있다. 팔레트 위에서 굳어버린 색들이야말로 구체적인 사건과 의미가 부재한 그의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기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화가 구성되는 다층적인 과정은 또 다른 회화 실험으로 연장된다. 이번에는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이 회화의 모티브로 재등장한다. 기존의 명제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과도 유사하지만, 작업의 잔해물 혹은 폐기물을 다시 카메라 바깥으로 꺼내어 되살리는 과정은 이제 그의 회화가 자율적으로 ‘순환의 궤도’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일회용 회화의 실험 이후 2021년부터는 이전보다 명확하게 글씨의 형상이 두드러진다(블루메, 2021). 글씨의 형상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어떤 의미 작용을 일으키지는 않는 듯하다. 작가는 이제 감상자가 그림과 제목을 비교하면서 유추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서를 제안했다고 설명한다. 어쩌면 이것은 입속에서 맴도는 ‘웅얼거림’의 장에서 2018년 개인전 표제인 “모두와 눈 맞추어 축하 인사를 건네고”의 문장처럼 다양한 관계를 맺어 가는 장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회화를 둘러싼 다양한 유형의 실험과 작업은 마치 리좀(Rhizome)이 필요에 따라 서로 접속하면서 어떤 생태계를 형성하는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생태계는 시간의 연대기와 무관하게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치 유기체처럼 순환하게 될 것 같다. 상기하면 이 ‘회화적 순환계’는 지워지고 버려진 것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작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작업에 강하게 눌러쓰지는 않지만, 서서히 형성되고 있는 이 회화적 세계의 배면에는 현실과 맞닿은 삶의 비애가 담겨 있다.

1)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가와의 대화 중, 2017
2) 정현, 네이버 헬로 아티스트 추천의 글에서 발췌, 2018
3)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1, p.23
4) 작가는 이를 “현장작업”이라 부른다.

웅얼거리는 흔적들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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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무엇을 구하는가? 과연 회화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작업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회화는 미술의 근본을 품은 채로 근대 이후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효용성에 대한 억측과 요구 사이를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 새로운 미디어가 나타날 때마다 회화의 죽음은 유행병처럼 미술 세계를 혼돈에 빠트렸지만, 그때마다 불사신처럼 부활하였다. 그렇게 21세기를 앞두고 몇 번의 고비를 거치면서 생존한 회화는 예전처럼 평면, 지지대, 프레임이라는 전통적인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일궈내고 있다. 회화적 실험은 전방위적으로 전개된다. 평면과 지지대를 버리고 실제 공간을 회화의 화면으로 삼아 감상의 대상에서 경험의 장으로 확장하고, 안료 대신 체액을 이용함으로써 신체와 회화의 물리적 관계가 형성되고, 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꾼 것처럼 회화가 영토를 표현하는 매체에서 지형도를 그리는 플랫폼이 되었다. 이처럼 동시대 회화는 구상과 추상, 미학과 현실 사이의 구분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이러한 경향을 ‘새로운 추상성’의 시대로 부른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것’의 귀환이 아니라 새로운 프레임으로 세계를 인식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 추상 미학이 추구한 내면성, 정신성의 강령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새로운 추상회화는 가상, 실재, 인종, 젠더, 문화, 사물, 국가, 사조, 이념을 넘어선 포용의 세계를 지향하며, 개인이 접속한 다양하고 다원적인 세계 간의 감각적 경험을 어떻게 회화라는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매혹적인 표현 방식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묻는다. 안상훈은 이러한 동시대 미술의 흐름 안에서 오히려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나 모더니즘 추상미술을 재방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속도와 스타일의 경쟁에서 벗어나 회화라는 ‘행위’의 가치와 의미가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지를 근시안적인 방법으로 더듬거리며 어디론가 나아가는 중이다. 그는 추상이란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회화의 목적은 아니다. 그는 되레 회화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렇다면 이제 회화와 회화를 지지하는 주변의 요소를 통하여 어떻게 회화가 구성되는지를 살펴보자.

 

그리기/지우기
“유학 시절에 정원사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이 그림 속에는 당시의 기억이 어렴풋이 담겨 있습니다. 굳이 기억을 재현하지는 않았어요. 제 그림은 매일의 기록, 일기와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일기는 아닙니다.”1) 안상훈은 자신의 회화가 하나의 상징으로 이어지는 걸 주의한다. 회화가 의미나 해석으로 이해되기보다 오로지 회화로 보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바람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우연의 힘을 빌린다고 했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전 작업의 표제를 전제로 작업을 진행하거나, 완성된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한 뒤 사진 파일의 일련번호를 구글링하여 검색된 정보 중에서 작품 표제를 선택하기도 한다. 의도적으로 우연을 개입시켜 익숙함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예술작품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연결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한 점의 그림(작품, Ergon)은 이미지와 물질(캔버스, 안료, 지지체), 담론적 요소(액자, 서명, 제목, 해설, 제작연도, 크기 등)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림 외부(작품의 주변, Parergon)에 위치한 담론적 요소가 실제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즉, 시각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의 상호작용이 작품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 곧 작품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외부와의 관계까지도 작품의 비가시적인 조건인 셈이다. 그렇다면 데리다는 왜 내부와 외부의 상호성을 주목했을까? 그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닫혀 있다고 보았다. 즉, 세계의 바깥은 없다. 예외적으로 예술만이 내외부 사이의 틈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나타날까? 작품의 의미는 그림이라는 사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는 사건의 주변부, 즉 프레임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한편 안상훈은 그림과 언어가 연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제목이 작품을 설명하거나 그것의 의미를 제시한다는 오해가 만들어질 수 없도록 말이다. 그림과 표제를 어긋나게 하는 작업 방식은 회화가 어떤 주제나 줄거리로 정리되는 것을 제한한다. 이처럼 의도된 어긋남은 우연과 필연, 선택과 포기의 과정을 거쳐 의미를 탈각하거나 반대로 뜻밖의 의미를 유발할 것이다. 따라서 회화의 의미는 임의적으로 무한 생산될 수 있다.

안상훈의 회화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대부분 색과 형태, 질감과 붓질(brushstroke)로 이뤄진다. 여기서 그리기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는 행위라기보다 기억을 꺼내어 다듬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그리기는 반대로 지우기와 겹친다. 마치 무형의 유물을 되찾기 위해 허공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을 연상시키는 이 행위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닌 ‘느낌을 감각하는 과정’이다. 안상훈이 화면 위에 남긴 흔적은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그가 어떤 기억을 되찾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덧없고 무모한 반복의 더듬기로 남겨진 얼룩과 붓질의 흔적이 곧 회화적 사건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형태들이 연쇄되고 포개어지고 색이 겹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자신이 몰랐던 감정이나 심리 상태를 마주치기도 하고, 전혀 본 적 없는 형태들이 나타나는 장면을 탐닉할 때도 있다.”2) 그것은 마치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지중해의 햇빛과 이글거리는 꽃을 연상시키는 사이 톰블리(Cy Twombly)의 회화를 두고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석한 것과도 어렴풋이 이어진다. 안상훈의 그리기/지우기의 겹침은 격정의 드러냄이 아닌 머뭇머뭇 복합적인 감정으로 다가가는 과정이다. 이미 텅 빈 주제를 다시 꺼내는 행위는 순환 철도를 무한 회귀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이 밀쳐낸 기억 속에서 불특정한 구간 사이를 왕복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익숙함을 반복하면서 멀어지는 것과 같다. 작가는 자신의 삶 내외부를 오가면서 무언가를 명시하기보다 어떤 망설임, 웅얼거림을 꺼내 온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이러한 웅얼거림을 두고 “작가의 글이 메아리”가 되는 것이라 비유한다. 메아리란 침묵의 결과이다. 블랑쇼는 “그 웅얼거림 위에 언어는 열리고 그리하여 언어는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라는 것이 되고, 말하는 깊이가 되고, 공허라는 어둑한 충만이 된다”3)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리기와 쓰기, 보여주기와 말하기는 정확한 의미를 제시하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블랑쇼는 이러한 관계의 전형성을 부정한다. 이것이 그리기가 지우기를 동반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누구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불현듯 솟아난 기억 때문에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다. 반가우면서도 되돌아갈 수 없음에 무기력해지는 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조각난 기억을 따라 더 먼 곳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아쉽지만 폐기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예술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기억을 되돌아보도록 도움을 준다.

회화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상훈은 독일에서 농장 건물 외벽을 화면 삼아 일종의 공공적 성격의 회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Brushstroke 3(H, M, N), 오래된 농장 벽 위에 벽화, Kunsthof Dahrenstedt, Germany, 2015). 이 경험은 안상훈에게 임의적이고 즉흥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독일의 야외 작업은 공간과 장소의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개념적인 기반으로 진화한다. <GOOD: PAINTING>(2017, 인천아트플랫폼)은 비닐을 이용한 한시적인 설치 회화를 실험한 전시이다. 안상훈은 이 계기를 통하여 그의 예술이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를 명시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회화가 무엇이며, 그것의 효용성이란 상투적인 질문을 넘어서 회화에 덧씌워진 좋고 나쁨 또는 옳고 그름이라는 미학적 가치를 질문한다. 비닐 막을 씌운 전시장 벽면, 그 얇은 막 위에 검은 얼룩처럼 보이는 선과 흔적이 뒤엉켜 있다. 관객은 이 낯선 장면 앞에서 자문하게 된다. 좋은 회화가 무엇인지를. 결론적으로 안상훈에게 회화는 그저 회화일 뿐이다. 회화의 좋고 나쁨은 형식주의 미학 안의 조건에서나 허용될 것이다. 그에게 회화는 정복해야 할 높은 산봉우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워져야 할 상징이다. 따라서 ‘좋은 회화’란 중의적인 물음이자 회화를 둘러싼 가치판단의 기준이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되묻는다.

회화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곧 화가/작가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을 위한 미술관>(2017)은 엄선된 자신의 작품 125점의 그림 중 작품명만 보고 1점을 선택하여 그 그림을 마주 보고 최대 5분간 감상하게 하는 실험이었다. 스튜디오 내부에는 일시적인 수장고가 제작되었고 85명의 참여자는 작품명 목록에서 보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였다. 과연 참여자들은 어떤 경험을 가졌을까? 누군가는 제목과 그림의 의미를 연결하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림 속에 의미를 작동시키는 단서가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5분을 꼼꼼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또 다른 전시 <매일매일 윈도우 프로젝트>(2018, 인천아트플랫폼)는 윈도 폭이 채 1m가 되지 않은 정체성이 모호한 전시 공간을 활용한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22일간 이 좁은 쇼윈도 안에서 작업을 진행한다. 그것은 회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수행적 퍼포먼스로,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 관광객, 이웃, 예술관계자 등에게 회화는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다소 무거운 질문을 어쩌면 조금 낭만적으로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전시 제목 “from the moment you walk through the door until the moment you leave(당신이 저 문을 통해 들어온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는 영화 아비정전(1990)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 아비(장국영)는 매일 3시 경기장 매표소를 찾아가 그곳에서 일하는 소려진(장만옥) 주변을 배회하길 반복한다. 하루는 소려진에게 다가가 “1분이란 시간 동안 자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란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자유인 아비는 소려진과 결혼을 원치 않았고 소려진은 그 1분을 영원히 기억한다. 쇼윈도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안상훈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영화 속 장국영/장만옥의 모습이 비친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리고 그림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22일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쇼윈도 앞을 지나갔으며 누가 그 내부로 들어왔을까? 이 같은 상상은 또 다른 프레임이 되어 의미를 생성한다. 그림이 생성되는 시간과 그 과정을 바라보는 감상의 시간이 겹쳐지고, 이 같은 상황 안에서 그리기와 지우기, 감상하기와 기억하기, 예술과 현실, 작품과 상품 등 여러 겹의 의미와 해석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온전한 의미와 해석이 아닌 마치 환영 같은 경험이 스치듯 지나간다.

순환하는 회화
안상훈은 종이, 캔버스 위에 주로 그림을 그리지만, 연약한 매체를 사용하는 것도 즐기는 편이다. 그것은 비닐 위에 그리는 회화로 <GOOD: PAINTING>(2017,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처음 선보인 그리기 방식이다. 주로 전시장 내외부의 벽을 사용하거나 가벽을 제작하여 벽 위에 비닐을 씌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면을 완성한다. 비닐 표면은 수성페인트로 보강되어 색과 질료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다. 그는 붓과 래커를 이용하여 이 연약한 표피 위에 몸이 움직이는 궤적과 같은 행위의 흔적을 남긴다. 캔버스 회화가 보존하기 수월한 매체라면 비닐 회화의 내구성은 매우 취약하다. 매체의 특성상 안료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처럼 쉽게 눌러지거나 벗겨지는 성질은 그리기와 지우기를 반복하는 회화 방식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듯하다. <창문을 여니 바람이 불어왔다>(2019, 수림미술관)는 비닐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할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에서는 비닐뿐만 아니라 대부도와 수림문화재단에서 수거한 현수막을 수성페인트로 초벌 후 그 표면 위에 특유한 흔적의 그리기/지우기를 진행한다. 비닐 회화는 이제 폐기물을 재활용한 일회용 회화로 진화한다. 안상훈은 일회용 회화를 매개로 현실의 부산물과 조우한다. 무엇보다 전시가 끝나면 일회용 회화는 미술의 자리에서 벗겨져 현실로 되돌아간다. 한편 이 일회용 회화는 캔버스 회화의 대구(對句)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버려진 사물이 캔버스의 대체물로 사용되자 순수와 현실, 관념과 실재가 혼재하게 되는데, 이는 추상미술을 향한 과장된 의미 부여와 시장 논리가 결탁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도 어느 정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화적 실험은 목적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목적지가 정해졌다면 실험을 지속할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 <빈 지속하는 언어>(샘표스페이스, 2020)에서는 2018년부터 3년간 사용한 일회용 회화의 산물4)을 한데 모은 회화-콜라주-설치 “2018-2020”(2020)을 선보인다. 그간 사용된 합판, 비닐, 아크릴판 등을 빼곡하게 모아놓은 모습은 마치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aldaccini)의 압축 조각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회화하기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의 삶을 자신답게 사는 방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기, 쓰기, 지우기와 같은 행위는 먹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닮았다. 최근 들어서는 팔레트가 그의 관심을 받고 있다. 팔레트 위에서 굳어버린 색들이야말로 구체적인 사건과 의미가 부재한 그의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기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화가 구성되는 다층적인 과정은 또 다른 회화 실험으로 연장된다. 이번에는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이 회화의 모티브로 재등장한다. 기존의 명제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과도 유사하지만, 작업의 잔해물 혹은 폐기물을 다시 카메라 바깥으로 꺼내어 되살리는 과정은 이제 그의 회화가 자율적으로 ‘순환의 궤도’로 진입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일회용 회화의 실험 이후 2021년부터는 이전보다 명확하게 글씨의 형상이 두드러진다(블루메, 2021). 글씨의 형상이 나타났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어떤 의미 작용을 일으키지는 않는 듯하다. 작가는 이제 감상자가 그림과 제목을 비교하면서 유추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서를 제안했다고 설명한다. 어쩌면 이것은 입속에서 맴도는 ‘웅얼거림’의 장에서 2018년 개인전 표제인 “모두와 눈 맞추어 축하 인사를 건네고”의 문장처럼 다양한 관계를 맺어 가는 장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회화를 둘러싼 다양한 유형의 실험과 작업은 마치 리좀(Rhizome)이 필요에 따라 서로 접속하면서 어떤 생태계를 형성하는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생태계는 시간의 연대기와 무관하게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치 유기체처럼 순환하게 될 것 같다. 상기하면 이 ‘회화적 순환계’는 지워지고 버려진 것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작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작업에 강하게 눌러쓰지는 않지만, 서서히 형성되고 있는 이 회화적 세계의 배면에는 현실과 맞닿은 삶의 비애가 담겨 있다.

1)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작가와의 대화 중, 2017
2) 정현, 네이버 헬로 아티스트 추천의 글에서 발췌, 2018
3)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1, p.23
4) 작가는 이를 “현장작업”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