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림

세 겹의 무대에 드리워진 이세계의 그림자들

이우림

이우림의 작품에는 청화 문양이 등장한다. 청화는 14세기 초에 처음 명나라로부터 수입된 화려한 청색문양의 도자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조선에서는 15세기 중엽에 세조의 명에 따라 전라도 순천을 중심으로 수준 높은 청화백자들이 생산되었으며, 조선 후기까지 도자기의 주된 형태로서 이어졌다고 한다. 청화는 그 안료의 희귀성으로 말미암아 조선 중기에는 오랜 기간 동안 사용이 금지되거나 싼 안료로 대체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좋은 품질의 안료의 공급과 화려함과 여백의 미가 적절히 조화된 문양으로 인해 중국이나 일본의 것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독자적 도자기로 발전하였다. 이우림의 작품에 청화 문양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 우아하고 화려한 한국의 서정적 문양을 회화 안에 접목하는 흥미로운 시도로 여겨진다. 이 문양들은 대체로 동물들에게 입혀져 있는데, 이는 인물을 주로 그린 작가의 과거의 그림들에서 인물들이 입고 있던 화려한 자연적 문양의 옷들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우림의 작품에는 세 가지 정도의 레이어들이 화면을 구성하는데, 첫 번째는 대부분의 대상들이 정물처럼 자리잡고 있는 전면의 공간이다. 대체로 회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배경과의 경계가 흐릿한 이 공간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이나 식물들이 포즈를 취하는 무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측면 위쪽에서 내려오는 조명 혹은 빛에 의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들을 표시하는 반사면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배경 혹은 원경인데, 여기에 나타나는 이미지는 숲으로부터 무대의 반투명 배경 막에 투사된 나뭇가지 그림자 (<닭이 있는 풍경>, 2021)혹은 아웃포커스 되어 멀어지는 원경의 풍경 (<A Walk>, 2018>)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더 앞쪽의 사물들의 그림자가 전면의 바닥 위로 드리워져 있는 경우이다. <A Walk>에서는 앞에 뛰어가는 강아지를 따라 달리는 자전거를 탄 여성의 그림자가, <호랑이가 있는 풍경>(2021)에서는 앉아서 낚시대를 던지는 남성과 그 뒤에 서서 뭔가를 읽고 있는 여성의 그림자가 전면부에 드리워져 있다.
화면을 세 가지 다른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이우림의 화면은 흡사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과 같은 연출가들이 서로 다른 시공간의 병치를 위해 무대를 나누어 사용했던 연출방식을 떠올린다. 윌슨은 <바다에서 온 여인>이나 <성 세바스찬의 죽음>과 같은 작품에서 현재, 과거, 미래의 시간을 동시에 같은 무대에서 보여주곤 했다. 이우림의 작품에서도 동물들이 상징적인 청화문양(물론 여기서는 붉은 색으로 문양이 그려지기도 한다.)을 입고 등장하는 신화적 서사의 시간이 있고, 멀리 뒤쪽의 풍경들 속에서 서로 얼싸안고 있는 인물들(<닭이 있는 풍경>)이나 해변가에서 휴식을 취하는 인물들(<A Walk>)이 흐릿한 배경 속에서 어른거리는 기억 속의 혹은 재현된 시간이 있다. 그리고 전경보다 훨씬 앞쪽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 위치하는(사실상, 관객의 위치 혹은 그보다 더 뒤쪽에 있는), 그림자에 의해 암시되어 있는 실재의 시공간이 있다.
따라서 이우림의 작품 속에서 화면 전면에 재현된 상징적 동물들, 특히 청화문양을 입고 있는 존재들의 의미는 그 문양이 의미하는 것, 즉 자연의 절정의 모습을 재현한 풍경을 몸에 두르고 있는 이상적 세계의 기호들인 것이다. 이 동물들 사이사이에는 청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오래된 축음기나 꽃을 피우고 있는 이국적 선인장 혹은 열대 식물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따라서 이우림의 작품 속에서 화면 전면에 재현된 상징적 동물들, 특히 청화문양을 입고 있는 존재들의 의미는 그 문양이 의미하는 것, 즉 자연의 절정의 모습을 재현한 풍경을 몸에 두르고 있는 이상적 세계의 기호들인 것이다. 이 동물들 사이사이에는 청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오래된 축음기나 꽃을 피우고 있는 이국적 선인장 혹은 열대 식물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이우림
b.1972
개인전
2021 <Walking on the edge>, 아뜰리에 아키, 서울
2019 <Sleeping in the Forest>, J+Gallery, 뉴욕
2018 <Sleeping in the Forest>, KANG CONTEMPORARY, 뉴욕
2017 <Sleeping in the Forest>, 표갤러리, 서울
주요 단체전
2021 <KAMS>, SHOUT Art Hub&Gallery, 홍콩
2020 <꿈의색, 꿈의 빛>, 어울아트센터, 대구
2019 <금호영아티스트: 16번의 태양과 69개의 눈>, 서울
<한국국제아트페어>, 코엑스, 서울
2018 <매체, 사람, 풍경>,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ACC 창작공간네트워크 레지던시>, 아시아창작스튜디오, 광주
<타이페이 아트페어>, 타이페이
2017 <ASIA WEEK>, KANG CONTEMPORARY, 뉴욕
<KOREAN- NOW AND THEN>, KANG CONTEMPORARY, 뉴욕
<ART MIAMI>, 마이애미
<ART JAKARTA>, 인도네시아
수상
2006 금호 영아티스트, 금호미술관
레지던시
2018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 창작스튜디오, 광주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작품 소장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하나은행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보라매병원
서울대학교병원
샌프란스병원
한국야쿠르트
귀뚜라미보일러
93 뮤지엄
카톨릭 대학병원
맘스 여성병원
화이트블럭아트센터
대구미술관

정물화의 질감을 가진 인물화의 장식 가치
반이정

다소곳이 무릎에 두 손 얹고 웅크려 앉은 남자, 자기 몸을 제 팔을 벌려 스스로 껴안은 뒷모습의 여자, 무성한 초록 숲에서 머리‧손목‧발목 부위만 노출한 인물, 열린 출입문 앞에 달마티안과 나란히 선 남자 그리고 그 남자처럼 재현 대상의 몸통을 일정한 패턴으로 채운 대상. 이우림의 회화는 이처럼 동일한 대표 도상을 발전적으로 반복하면서 자기 브랜드를 각인시킨 경우라 하겠다. 그의 대표 도상은 서너 개의 고정된 제목을 번갈아 달면서 제시되었고 그것이 각인 효과로 이어졌다.

이우림의 화면에는 허리가 움푹 파인 도자기 체형에 댕기 머리를 한 여자, 부치 커트 스타일의 남성 캐릭터, 청회색 피부를 한 표정 없는 얼굴이 대표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대표 도상은 ‘산책’, ‘몽(夢)’, ‘숲속에서’처럼 고정된 제목을 달고 제시되어 왔다. 그렇다고 특정 도상이 또 다른 특정 제목과 독점적으로 연결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부치 커트 머리로 문 앞에 웅크려 앉은 남자는 2002년 작업에선 ‘몽(夢)’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2020년 작업에선 ‘숲속에서’라는 제목으로 제시된다. 달마티안과 나란히 있는 검정 꽃무늬 패턴 사내도 2009년에는 ‘산책’이지만, 2021년에는 ‘숲속에서’라는 제목으로 출현한다.

자기 브랜드로 각인된 대표 도상, 고정된 작품 제목, 단독으로 존재하는 등장인물, 거기에 더해 2000년대 중반 전후로 그림 속에 출현한 여러 대상이 줄곧 상호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각기 단독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 점, 하나의 도상이 각기 다른 제목으로 연달아 출현하는 점 등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 이우림의 작품세계는 주제나 서사가 아닌 첫인상과 장식적 가치에 방점을 둔 회화, 변화된 회화의 경향이라고 가정해 본다.

대개 한 명, 더러는 두어 명의 인상적인 캐릭터를 내세우는 이우림의 인물화는 정물화처럼 제시된다. 꽃무늬와 갖가지 패턴으로 채워진 ‘도자기 형태’의 몸매를 앞세운 여성 인물화는 뒷모습만 보여줄 뿐 얼굴 표정을 가리고 있다. 이미 충분히 무표정한 등장인물은 청회색 피부로 더욱 ‘무기체의 정물’처럼 관람된다. 그의 작업 연보를 볼 때 초반 대표작처럼 인식되는 웅크려 앉은 남자의 인물상도 손과 발을 한데 모은 자세 때문에 도자기 정물처럼 지각되며, 꾹 닫은 입과 눈은 복잡한 서사를 간단명료하게 압축해 버린다.

거의 동일해 보이는 그림이 다른 제목의 연작에 출현하는 것도, 작품 제목이 지칭하는 내용이나 주제에 비중을 두기보다 제목의 울타리에 한정되지 않고 첫인상의 시각적 효과와 장식 가치에 비중을 뒀던 미술의 원형 혹은 선호도 높은 미술품의 원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요즘 세대의 회화 작가는 평면에 국한하지 않고 2차원 평면과 3차원 입체를 오가며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병행한다. 그뿐 아니라 단 하나의 고유한 매체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이우림도 자신의 작업에 단골처럼 등장시킨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감싼 부르카 같은 원피스 차림의 여성 도상을 그림처럼 납작한 평면 조각으로 제작한 바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추상적인 외형의 회화가 출현하는 현상은 뉴미디어와 인터넷을 체험한 세대가 앞선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미감을 체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변화된 회화가 출현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장식미술이라는 용어는 기능적 용도와 외관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물로 곧잘 정의된다. 인테리어 건축 공예 등이 장식미술에 속하며 순수미술과는 구분되는 형편이다. 순수미술과 장식미술의 구분은 일견 타당해 보이면서도 선명하게 나눌 수 없는 이유는 고대 중국 미술이나 초기 중세 미술, 이슬람 미술처럼 유구한 역사의 미술품이 장식미술의 범주에 속하는 사정으로 설명된다. 더구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시기마다 존중받는 미술품 중에는 장식 가치로 주목받은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후반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은 미술이 아닌 대량생산물에 독창적인 장식 가치를 도입하려 했던 집단적인 시도로 기록되고 있고, 1970년대 중반 이후로도 미술공예운동에 자극받은 일군의 미술가는 이슬람, 비잔틴, 켈트 지역에서 생산된 직물 모자이크 자수 벽지 등에 영감을 받아 장식적 가치에 방점을 둔 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이우림의 인물화가 정물화의 질감에 가깝다는 해석은 앞서 밝힌 바 있다. 그의 대표작을 살펴보자. 부치 커트 머리로 문 앞에 웅크려 앉은 남자 그림은 제목이 ‘몽(夢)’(2000)으로 붙어 있건 ‘숲속에서’(2020)라고 붙어 있건 제목이 지칭하는 의미에서 떨어져 나와 잘 다듬어진 장식품, 도자기 정물에 가깝게 존재한다. 무릇 이우림의 그림 속 주인공은 이처럼 다양한 정물 가운데 도자기에 근접한 형태로 재현되어 왔다. 다소곳이 제 몸통을 두 팔로 부둥켜안은 여성 도상을 보자. 이 작품은 제 팔로 자기 몸통을 부둥켜안거나, 숲에서 누군가의 팔이 불쑥 나와서 여성의 몸통을 껴안거나, 그 두 가지의 경우로 해석되어 온 것 같다.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이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원피스 차림 여성의 인체는 도자기 정물과 겹쳐서 생각된다.

이에 더해 이전까지 대상의 몸통을 채웠던 꽃무늬 패턴이 2019년 전후로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대체되면서 정물화의 특징을 보다 더 부각하고 있다. 최근작 중 <산책>(2021)은 종래 꽃무늬 패턴 원피스 차림으로 등장했던 여성의 몸통 무늬가 청화백자 문양으로 대체되어 인체의 유선형과 도자기의 곡선이 동기화되면서 인물을 보다 더 정물처럼 보이게 한다. 이우림의 작업의 계보에는 관람 가치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대표 도상으로 출현하는 뒷모습의 여성 인체가 만드는 유선 형태는 자연스레 도자기라는 정물을 연상시키면서 장식 가치를 보탠다. 재현 대상의 외형이 지닌 ‘도자기다움’은 2020년 전후로 새로운 재료의 발견을 통해 더해지는데, 그것은 레진 효과이다. 레진은 평면 회화의 표면에서 도자기의 심미적 효과를 만들었다.

초기 작업부터 화면 내에서 부수적인 몫을 수행한 그림자도 2019년 전후로 더 전면에 나선 느낌이다. 이우림의 작업 연보를 통틀어 원근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자가 추가된 적은 없어 보인다. 한 화면에 출현하는 대상이 제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림자도 독자성을 지닌 요소로 보인다.

급기야 <산책>(2019)에는 주인공 격인 청화백자 문양을 몸통에 채운 부엉이 앞에 달리는 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호랑이가 있는 풍경>(2021)에는 주인공 격인 빨간 백자 문양을 몸통에 채운 호랑이 앞에 의자에 앉은 남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 그림 모두 그림자를 드리운 ‘달리는 말’이나 ‘의자에 앉은 남성’은 종적을 감춘 채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대상의 부수 효과로서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림자이다.

‘산책’, ‘몽(夢)’, ‘숲속에서’처럼 고정된 제목 아래로 느슨하게 분류되는 작업, 표정 없는 얼굴과 인물화의 묘사에 인물의 후면과 측면을 내세워서 요란한 스토리텔링에 침묵하는 인물 캐릭터, 정물화의 질감을 지닌 인물화, 한 화면에 등장하는 요소가 상호 연관성보다 독자적인 존재감을 앞세우는 점, 꽃무늬 패턴에서 청화백자 문양으로 채워진 인물과 사물의 장식적인 몸통, 이 모두는 과유불급의 스토리텔링 미술의 시대와는 저무는 와중에 출현하는, 변화된 회화 양상의 징표이다.

정물화의 질감을 가진 인물화의 장식 가치
반이정

다소곳이 무릎에 두 손 얹고 웅크려 앉은 남자, 자기 몸을 제 팔을 벌려 스스로 껴안은 뒷모습의 여자, 무성한 초록 숲에서 머리‧손목‧발목 부위만 노출한 인물, 열린 출입문 앞에 달마티안과 나란히 선 남자 그리고 그 남자처럼 재현 대상의 몸통을 일정한 패턴으로 채운 대상. 이우림의 회화는 이처럼 동일한 대표 도상을 발전적으로 반복하면서 자기 브랜드를 각인시킨 경우라 하겠다. 그의 대표 도상은 서너 개의 고정된 제목을 번갈아 달면서 제시되었고 그것이 각인 효과로 이어졌다.

이우림의 화면에는 허리가 움푹 파인 도자기 체형에 댕기 머리를 한 여자, 부치 커트 스타일의 남성 캐릭터, 청회색 피부를 한 표정 없는 얼굴이 대표 캐릭터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대표 도상은 ‘산책’, ‘몽(夢)’, ‘숲속에서’처럼 고정된 제목을 달고 제시되어 왔다. 그렇다고 특정 도상이 또 다른 특정 제목과 독점적으로 연결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부치 커트 머리로 문 앞에 웅크려 앉은 남자는 2002년 작업에선 ‘몽(夢)’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2020년 작업에선 ‘숲속에서’라는 제목으로 제시된다. 달마티안과 나란히 있는 검정 꽃무늬 패턴 사내도 2009년에는 ‘산책’이지만, 2021년에는 ‘숲속에서’라는 제목으로 출현한다.

자기 브랜드로 각인된 대표 도상, 고정된 작품 제목, 단독으로 존재하는 등장인물, 거기에 더해 2000년대 중반 전후로 그림 속에 출현한 여러 대상이 줄곧 상호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각기 단독으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 점, 하나의 도상이 각기 다른 제목으로 연달아 출현하는 점 등 전반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 이우림의 작품세계는 주제나 서사가 아닌 첫인상과 장식적 가치에 방점을 둔 회화, 변화된 회화의 경향이라고 가정해 본다.

대개 한 명, 더러는 두어 명의 인상적인 캐릭터를 내세우는 이우림의 인물화는 정물화처럼 제시된다. 꽃무늬와 갖가지 패턴으로 채워진 ‘도자기 형태’의 몸매를 앞세운 여성 인물화는 뒷모습만 보여줄 뿐 얼굴 표정을 가리고 있다. 이미 충분히 무표정한 등장인물은 청회색 피부로 더욱 ‘무기체의 정물’처럼 관람된다. 그의 작업 연보를 볼 때 초반 대표작처럼 인식되는 웅크려 앉은 남자의 인물상도 손과 발을 한데 모은 자세 때문에 도자기 정물처럼 지각되며, 꾹 닫은 입과 눈은 복잡한 서사를 간단명료하게 압축해 버린다.

거의 동일해 보이는 그림이 다른 제목의 연작에 출현하는 것도, 작품 제목이 지칭하는 내용이나 주제에 비중을 두기보다 제목의 울타리에 한정되지 않고 첫인상의 시각적 효과와 장식 가치에 비중을 뒀던 미술의 원형 혹은 선호도 높은 미술품의 원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요즘 세대의 회화 작가는 평면에 국한하지 않고 2차원 평면과 3차원 입체를 오가며 장르적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병행한다. 그뿐 아니라 단 하나의 고유한 매체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이우림도 자신의 작업에 단골처럼 등장시킨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감싼 부르카 같은 원피스 차림의 여성 도상을 그림처럼 납작한 평면 조각으로 제작한 바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추상적인 외형의 회화가 출현하는 현상은 뉴미디어와 인터넷을 체험한 세대가 앞선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미감을 체험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변화된 회화가 출현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장식미술이라는 용어는 기능적 용도와 외관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물로 곧잘 정의된다. 인테리어 건축 공예 등이 장식미술에 속하며 순수미술과는 구분되는 형편이다. 순수미술과 장식미술의 구분은 일견 타당해 보이면서도 선명하게 나눌 수 없는 이유는 고대 중국 미술이나 초기 중세 미술, 이슬람 미술처럼 유구한 역사의 미술품이 장식미술의 범주에 속하는 사정으로 설명된다. 더구나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시기마다 존중받는 미술품 중에는 장식 가치로 주목받은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후반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은 미술이 아닌 대량생산물에 독창적인 장식 가치를 도입하려 했던 집단적인 시도로 기록되고 있고, 1970년대 중반 이후로도 미술공예운동에 자극받은 일군의 미술가는 이슬람, 비잔틴, 켈트 지역에서 생산된 직물 모자이크 자수 벽지 등에 영감을 받아 장식적 가치에 방점을 둔 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이우림의 인물화가 정물화의 질감에 가깝다는 해석은 앞서 밝힌 바 있다. 그의 대표작을 살펴보자. 부치 커트 머리로 문 앞에 웅크려 앉은 남자 그림은 제목이 ‘몽(夢)’(2000)으로 붙어 있건 ‘숲속에서’(2020)라고 붙어 있건 제목이 지칭하는 의미에서 떨어져 나와 잘 다듬어진 장식품, 도자기 정물에 가깝게 존재한다. 무릇 이우림의 그림 속 주인공은 이처럼 다양한 정물 가운데 도자기에 근접한 형태로 재현되어 왔다. 다소곳이 제 몸통을 두 팔로 부둥켜안은 여성 도상을 보자. 이 작품은 제 팔로 자기 몸통을 부둥켜안거나, 숲에서 누군가의 팔이 불쑥 나와서 여성의 몸통을 껴안거나, 그 두 가지의 경우로 해석되어 온 것 같다. 어느 것이어도 상관없이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원피스 차림 여성의 인체는 도자기 정물과 겹쳐서 생각된다.

이에 더해 이전까지 대상의 몸통을 채웠던 꽃무늬 패턴이 2019년 전후로 청화백자의 문양으로 대체되면서 정물화의 특징을 보다 더 부각하고 있다. 최근작 중 <산책>(2021)은 종래 꽃무늬 패턴 원피스 차림으로 등장했던 여성의 몸통 무늬가 청화백자 문양으로 대체되어 인체의 유선형과 도자기의 곡선이 동기화되면서 인물을 보다 더 정물처럼 보이게 한다. 이우림의 작업의 계보에는 관람 가치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대표 도상으로 출현하는 뒷모습의 여성 인체가 만드는 유선 형태는 자연스레 도자기라는 정물을 연상시키면서 장식 가치를 보탠다. 재현 대상의 외형이 지닌 ‘도자기다움’은 2020년 전후로 새로운 재료의 발견을 통해 더해지는데, 그것은 레진 효과이다. 레진은 평면 회화의 표면에서 도자기의 심미적 효과를 만들었다.

초기 작업부터 화면 내에서 부수적인 몫을 수행한 그림자도 2019년 전후로 더 전면에 나선 느낌이다. 이우림의 작업 연보를 통틀어 원근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자가 추가된 적은 없어 보인다. 한 화면에 출현하는 대상이 제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림자도 독자성을 지닌 요소로 보인다.

급기야 <산책>(2019)에는 주인공 격인 청화백자 문양을 몸통에 채운 부엉이 앞에 달리는 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호랑이가 있는 풍경>(2021)에는 주인공 격인 빨간 백자 문양을 몸통에 채운 호랑이 앞에 의자에 앉은 남성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 그림 모두 그림자를 드리운 ‘달리는 말’이나 ‘의자에 앉은 남성’은 종적을 감춘 채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대상의 부수 효과로서의 그림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림자이다.

‘산책’, ‘몽(夢)’, ‘숲속에서’처럼 고정된 제목 아래로 느슨하게 분류되는 작업, 표정 없는 얼굴과 인물화의 묘사에 인물의 후면과 측면을 내세워서 요란한 스토리텔링에 침묵하는 인물 캐릭터, 정물화의 질감을 지닌 인물화, 한 화면에 등장하는 요소가 상호 연관성보다 독자적인 존재감을 앞세우는 점, 꽃무늬 패턴에서 청화백자 문양으로 채워진 인물과 사물의 장식적인 몸통, 이 모두는 과유불급의 스토리텔링 미술의 시대와는 저무는 와중에 출현하는, 변화된 회화 양상의 징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