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노력
차영석
차영석의 그림은 공간의 구성과 소재의 선택, 화면의 분위기 등 모든 면에서 조용하면서도 극적인 감정의 선을 재현한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시간이 서로 스며드는 가운데 어떤 단서, 명확한 감각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섬세하고 정교한 응시의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화가는 이 모든 장면들을 감싸는 빛을 조율하고 우아함과 따뜻함, 대상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낼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를 선택한다. 대상인 사물들과 내가 서로에게 몰입하는 것. 한국의 전통적 문인화에서 추구했던 태도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차영석은 한지에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흥미로운 점은 연필이 사용되는 방식인데, 그의 작품들은 초기부터 흐릿한 연필선을 짧게 반복해서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음영의 톤을 만들고 부분적으로 진한 부분적 얼룩들을 만들어 화면의 리듬을 구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건강한 정물> 연작의 후반으로 가면, 화면에 사물들이 많아지면서 이야기와 시선의 착점은 더욱 다양해지고 구성의 밀도가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 등장하는 사물들은 고전적인 한국화의 전형적인 모티브들인 파석, 자기, 분재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들 및 고미술품 등 뿐 아니라, 현대적 모티브들 즉, 인형, 트로피, 자동차나 배, 장난감, 공, 운동화, 목걸이 같은 장신구들이 등장하여 작품의 시대적 배경보다는 작가의 사물에 대한 취향에 더 주목하게 한다.
차영석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한국화, 그 중에서도 정물화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등위원근법을 이용한 사물들의 배치와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건강한 정물> 연작에서 전체 시점은 약 45도 정도 높이에서 바라본 것으로 그려져 있어 정물들은 서로 겹치지 않고 모두 모습을 잘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사물은 측면 약 20도 정도 높이에서 본 것으로 그려져 있어 이것이 동양적 정물화의 고유한 관념적 원근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차영석의 정물화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인 공간과 그에 속하는 사물들을 그린 것이다.
차영석의 회화는 한지 고유의 은은한 백색 혹은 미색으로부터 비롯된 여백의 빛을 광범위하게 활용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한국화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다. 연필의 부드러운 터치는 흑연 입자들 사이의 빛을 새어 나오게 함으로써 화면 전체에 독특한 부드러움이 깔리게 한다. 배경에 녹아드는 흐릿함과 리드미컬한 불투명의 흑색, 혹은 채색은 화면에 예기치 못한 주목점들을 배분하면서 흥미로운 시각적 유희를 만들어낸다. 반면 2019년의 <우아한 노력> 연작 중 검은 바탕에 매를 그린 그림에서는, 흐릿한 회색의 연필선들 위에 밝은 베이지 톤의 깃털 문양을 새겨 넣으면서 이전의 그림들에 비해 더 윤곽선이 뚜렷한 묘사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교한 묘사는 같은 연작의 5첩 병풍으로 이루어진 그림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처음으로 화려한 스펙트럼의 채색이 매의 깃털 문양에 적용되고 있다.
비록 하찮고 소소한 것들로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하수상한 일상의 풍경들이겠지만, 그리고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본질로 환원되어 존재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런 정물화가 아닌 일상의 파편들로 일시적으로 덧없이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그 정지된 순간만큼은 ‘건강하게’ 자리하는 것들을 향한 작가적인 배려의 시선이 느껴지는 그런 정물화로 다가오는 것이다. 마치 세속적인 삶 속에서 건강하게 잘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들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미적인 혹은 감성화 된 삶을 향한 작가를 포함한 우리네 이웃들의 간절하고 애틋한 희구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민병직(전시기획, 평론)